[정희원의 늙기의 기술] 중요한 건 2000명이 아니라 거품 없는 환자 중심 의료다
지난 한 달은 필자의 몸에 가속노화 실험을 하는 시간이었다. 일단 수면이 부족했다. 누차 말했지만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거나 운동의 효과를 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충분한 잠이다. 수면 부족이 누적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의 정상적인 패턴이 망가진다. 내가 먹는 음식의 에너지는 뱃살에 쌓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근육은 쉽사리 녹아내린다. 과잉 분비된 코르티솔은 판단력, 기억력, 자제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므로, ‘가속노화’ 음식을 탐닉할 가능성이 높다. 살이 찌고 근육이 녹기 쉬운 상태에서 가속노화 음식까지 먹는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악순환이다. 거기다 코르티솔에 절어버린 뇌는 과각성에 빠져 잠을 이루기가 어렵고, 쉬 깨게 된다. 수면이 부족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을 떨어뜨리고 수면의 질을 높이는 운동과 머리 비우기라도 해야 할 텐데, 이 또한 언감생심이었다.
의과대학 정원 증원을 의료 시스템 개선의 필요조건으로 정부가 못 박은 이래, 지금까지 의·정 갈등은 평행선을 달리는 중이다. 전공의와 전임의가 병원을 떠난 뒤, 지난 한 달 보름 동안은 13년 만에 주 100시간 근무를 다시 경험하는 중이다. 전국의 모든 대학병원을 지키는 전문의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는 주당 52시간으로 근무를 제한하고 당직 다음 날 외래 및 수술 등 정규 업무를 제한하기로 하였지만, 이미 입원과 수술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가 가득 예약된 외래를 급히 닫는 일은 쉽지 않다. 수면 박탈이 심해진 교수들의 건강에 대한 우려와 환자 안전에 대한 우려가 동시에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의사 집단의 통일된 의견 개진을 요구하고 있는 와중에, 반대편에서는 의료개혁 계획 전반의 전면 백지화 없이는 절대로 대화가 시작될 수 없다는 강경한 주장이 이어진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의견을 굽히지 않는 여러 의사 집단의 권위의식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들끓는 와중에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된 의대생 정원 증원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주장하는 과학적 근거의 근간은 2035년까지 의사 수 1만명이 부족하며, 의사가 배출되는 데 6년이 소요되므로 연간 2000명의 증원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정부가 근거로 삼는 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KDI 보고서, 서울대 의대 홍윤철 교수의 보고서 중 2035년까지 의사 수 1만명이 부족하다는 결과를 제시한 연구는 서울의대 홍윤철 교수의 연구가 유일하다. 정부의 의료 개혁 4대 과제는 의료인력 확충과 함께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보상 체계 공정성 제고를 포함한다. 여기에 올해 2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 계획을 더해보면, 정부가 인지하고 있는 현재 의료시스템의 문제점과 이를 어떻게 해소하려는 계획인지를 엿볼 수 있다.
국민이 요구하는 우리나라의 미래 의료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환자가 필요할 때 즉각적으로, 전국 어디서든 최고 품질의 의료를 최저가로 제공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될 것이다. 이 중 특히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에 대한 수도권 외 지역에서의 접근성 부족 문제는 의료 개혁 4대 과제 중 의료인력 확충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정책에 의해 상당 부분 없어질 여지가 존재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의료 과잉 공급과 과잉 소비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분절화된 진료 체계로 인해 연간 외래 진료 이용 횟수는 OECD 평균의 2배를 넘고, 약을 위험하리만큼 많이 먹는 사람의 비율도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 계획에서는 환자 중심, 가치 중심의 의료를 강조하며 우리나라의 의료에 끼어 있는 거품을 해소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의료 시스템의 쏠림을 완화하고 거품을 제거하는 구조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의사는 얼마나 더 필요할까? 보건복지부가 2000명 증원의 과학적 근거로 사용한 홍윤철 교수의 2020년 보고서에 해답이 있다. 2040년까지 의료 공급 시스템 변화를 통해 한국의 30% 의사가 주치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의대생 증원 없이도 2040년 기준 의사 부족수는 2600명에 불과하다. 11만 명 이상의 활동의사수를 고려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총인구가 감소하기에 2055년부터는 의사가 오히려 과잉 공급되게 된다. 같은 분석에서 의대생 증원 규모를 연간 250명으로 유지하는 경우 2050년부터 의사가 과잉 공급되게 되며, 500명 증원으로 유지하는 경우 2045년 이후부터 과잉 공급이 발생하게 된다. 이 분석을 고려하면, 공급을 효율화하고 불필요한 수요를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의사 부족분은 큰 폭으로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아직 고려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동안 ‘늙기의 기술’ 연재에서 다룬 것처럼, 우리나라 노인들의 건강 상태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만성질환의 예후를 큰 폭으로 개선할 수 있는 신약을 비롯한 의료 기술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치매, 당뇨병, 심부전을 비롯한 수많은 만성 질환의 치료 기술이 개선되며 병이 있더라도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유병 장수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홍윤철 교수의 계산에서는 이러한 혁신적 변화를 고려하지는 않고, 단순히 의사의 생산성이 해마다 0.5% 개선되는 것을 가정하였으므로, 노인의 증가에 따른 의료 수요 증가를 과대 계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2000명 증원을 의료 개혁의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정책적 의사 결정에는 근거가 필요하다. 미래를 예측하는 근거에는 어떤 가정이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하다. 그 가정 자체가 의료 개혁의 노력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지금의 보건의료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국민이 승리자가 될 수 있는 더 나은 미래 한국 의료의 모습을 논의하고, 이에 따른 합리적 의사 수요를 도출하는 대화와 합의의 과정이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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