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도청 벚꽃 길

경기일보 2024. 4.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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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필 무렵 해마다 도청 길을 걸었다. 가끔 놓쳐버린 버스처럼 봄이 지고 마지막 꽃비가 흩날릴 때도 있었다. 봄은 짧고 평범한 세월처럼 인색하다. 그래도 보고 나니 올 한 해가 덜 억울할 것 같다.

거룩한 순례처럼 꽃길 돌아 지석묘가 있는 팔달산 기슭에 올랐다. 다시 화양루가 있는 성벽 따라 서장대로 향한다. 시내 풍경은 해마다 다르다. 내가 사는 매교동이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길가엔 명자꽃, 서양수수꽃다리꽃, 조팝나무가 향을 쏟는다. 홍도화는 아직 색이 옅다.

화서문, 장안문을 지나 화홍문까지 와서 행궁동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왕대포집이 이사를 와서 아직 거꾸로 된 간판을 뒤집어쓰고 있다. 매향통닭은 잔칫집처럼 손님이 넘쳤다. 지동시장 순댓집에서 막걸리 한잔 걸친다. 전율처럼 빈 속이 짜릿하게 흐른다. 엉켜 있던 마음이 스르르 해체되는 기분, 봄날 하루가 저문다. 남수문 아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와 몇 해 전 성급히 하늘로 떠난 후배가 떠올랐다. 수원천에서 깃발 전을 설치하며 밤길을 걸었던 아우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다.

이사할 때 심어준 왕벚나무는 잘 자라고 있을까. 많이 보고 싶다. 봄마다 돋아나는 시 한 편이 스친다. ‘전송하면서/살고 있네/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봄날의 물속에서/귓속말로/속살거리지,/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네.’ –마종기 ‘연가 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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