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먹으려 日고교생들이 벌인일… “어른보다 낫네” 말나온 이유 [방구석 도쿄통신]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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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학생들의 사회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1960~70년대입니다. 이때 ‘특정 학생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건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란 비판으로 학생회장 제도를 철폐하고, ‘사권분립’이란 이례적인 제도를 도입했던 고등학교가 화제인데요. 최근 50여 년 만에 학생회장제를 부활시켰기 때문입니다. 민영방송 TBS 등 현지 언론들은 이 고등학교가 반세기 만에 학생회 제도를 재개편한 배경과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 사이에선 ‘기득권 구도’로 굳혀진 일본 정치판에도 시사점이 있다며 주목 중입니다.
화제가 된 고등학교는 일본 센다이시 미야기노구에 있는 공립 고교 ‘미야기켄센다이다이산고(미야기현 센다이 제3고등학교·이하 센다이제3고)’입니다. 이 학교는 1년 전인 지난해 4월 학생회장 제도를 부활시켰는데요. 1963년 개교한 이 학교에 학생회장제가 사라진 건 1971년의 일입니다. 당시 사회 운동에 참여하던 학생들이 ‘한 명이 권력을 독식해선 안 된다’고 지적하며 나온 조치였습니다.
대신 이 학교는 학생회장제 대신 사권분립제라는 독자적인 제도를 들여왔습니다. 전교생으로 구성된 학생회를, 1~3학년 각 반의 대표자(반장)로 구성된 ‘대의원회’와 학생 운동에 관심 있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집행부’, 이들의 활동을 감시하는 ‘감사위원회’와 ‘회계’등 4개 기관으로 나눴습니다. 모두 독립된 기관으로 겸임은 불가능하죠. 이 중 대의원회 의장은 학생총회에 의안을 제출할 권리를 가지지만 집행 권한은 없습니다. 기존 학생회장과의 역할에 차이를 둔 것이죠. 총회에서 의결된 사안을 집행하는 권한은 집행부에 주어졌으나 이들은 대의원회처럼 스스로 발안할 순 없었습니다.
센다이제3고는 반세기 넘게 독특한 사권분립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대의원회와 집행부로의 권력 분산이 학생회 기능을 지나치게 저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인 집행부원들은 의안 제안권이 없어 대의원회가 정한 사안을 뒤에서 ‘비난하기만 하는’ 조직일 뿐이었다고 한 졸업생이 TBS에 말했습니다. 한편 의안 제안권을 가진 대의원회는 각 반 대표자로 구성되나, 그중엔 가위바위보에서 진 바람에 반장이 된 학생도 있는 등 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가 상당수였다고 합니다.
이에 ‘학생회장제 부활’이란 의제를 꺼내고 나선 건 2021~22년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고토 에미카였습니다. 동기는 다름 아닌 ‘매점 아이스크림 판매’ 문제였다고 하는데요. 1학년이었던 2021년 의장직에 오른 그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아 달라’는 대의원들 의견에 따라 이를 학생총회 의결에 부쳐 통과시켰으나, 아이스크림 종류와 판매 기간 등 세부 사항이 일일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사권분립의 구조적 문제 탓에 미뤄지면서 실제 판매 개시까지 1년이 소요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는 ‘학생회 활동이 정체되고 있다. 학생회장제로 회귀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교내 방송부 출신이었던 그는 사권분립제의 문제점을 영상으로 알기 쉽게 제작해 학생들에게 뿌렸습니다. 그 결과 학생회 활동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점차 문제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2022년 5월 ‘학생회장제 부활’ 안건을 학생총회 의제에 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2시간에 달하는 질의를 거쳐 투표에 돌입했고, 결과는 찬성 664명과 반대 176명으로 전교생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며 가결됐습니다.
이후 센다이제3고 학생회는 기존의 대의원회와 집행부를 통합한 ‘학생회 본부’를 신설, 그 수장 자리에 학생회장을 두도록 제도를 개편했습니다. 고토의 뒤를 이어 2022년 후기 대의원회 의장에 오른 이토 소타가 지난해 4월 학생회장으로 취임했죠. 사권분립제가 도입된 1971년 마지막 학생회장 이후 51년 만의 학생회장이었습니다. 이토는 당시 “학생회 활동에 의욕 있는 사람들이 더 적극적인 활동에 나설 수 있게 됐다”고 했죠.
센다이제3고 학생회의 역사는 지난해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고교 방송부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과거 대의원회 의장들과의 인터뷰와 학생회장제 부활을 안건으로 했던 2022년 대의원 의결 과정을 약 10분짜리 영상에 담았죠. 작품명은 ‘51년 만의 학생회장’. 지난해 11월 일본방송협회 등이 주최하는 ‘지방의 시대 영상제’에서 고교생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교생들의 자발적인 ‘학생회 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용기, 대다수를 설득하려는 끈기가 대단하다” “학교의 꼭두각시가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학생회란 점에서 어른들도 배울 점이 있다”는 등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지 매체 도호쿠360은 “이들의 ‘실천’은 단순한 제도 변경에 그치지 않는다. ‘젊은층의 정치 무관심’이 사회 문제로도 부상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이 훌륭하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해낸 것이다. 앞으로 이들이 사회에 진출해 다양한 과제를 풀어가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한 네티즌은 “요즘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자신의 이권을 지키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만큼 현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보다 좋은 방향으로의 개선을 꿈꾸는 젊은 학생들의 존재가 귀중하다. 사회에서도 그 힘을 발휘해달라”고 했습니다.
4월 10일 서른세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어른 못지않게, 아니면 어른보다 훨씬 훌륭하게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해낸 일본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31~32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日 지폐 신권 발행 넉달앞… 새로 실릴 인물들 누구?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3/27/JQMNTL5IVZBU7PURLKQ3JARH6Q/
벚꽃의 역설… 暖冬에도 늦게 핀 도쿄, 왜?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4/03/23KHNOZD25DMJHINVZBQJKHQ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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