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조은아]“중고옷 kg당 3만 원”… ‘킬로숍’ 향하는 파리지앵들

조은아 파리 특파원 2024. 4. 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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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명소 대형건물에 ‘킬로숍’… 여러 벌 사도 1kg 최저 3만원대
유럽 곳곳서 ‘킬로쇼핑’ 장터도… 명품 중고매장도 덩달아 성장
생활비 절약에 옷 폐기물 줄여… ‘올드머니룩’ 패션 열풍도 한몫
조은아 파리 특파원
《패션중심 파리, ‘중고옷 쇼핑’ 열풍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6구 생제르맹 거리. 유명 문인들이 즐겨 찾던 카페 레되마고,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묘가 있는 생제르맹데프레 성당과 걸어서 5분 거리에 ‘킬로숍’이 있었다. 킬로숍은 중고 의류 여러 벌을 kg 단위로 파는 가게다. 이 매장에서 중고 옷을 쇼핑백에 한 가득 사 들고 나오던 로아 미야 씨는 “데님 스커트 한 벌을 10유로(약 1만5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샀다. 옷 상태가 정말 좋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여름 옷은 가볍기 때문에 15유로(약 2만2500원)에 네다섯 벌을 살 수 있다”며 벌써부터 여름 쇼핑을 기대했다. 옷이 몇 벌이든 무게만 따져서 팔기에 가벼운 여름 옷은 같은 가격에 더 많이 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날 기자 또한 봄 니트 두 벌, 청바지 한 벌을 20유로(약 3만 원)에 샀다. 가게에 마련된 저울에 재 보니 1kg이었다.》






● 중고 옷가게, 3년간 67곳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도심의 중고 의류 매장 ‘킬로숍’에서 소비자들이 상품을 살펴보고 있다. 성인 옷, 유아 옷, 모자, 스카프, 가방 등을 팔고 있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과거에 중고 옷가게는 서민 동네에서 수수하게 운영되는 편이었다. 이제는 생제르맹 거리, 뤽상부르 공원 인근, 마레지구 등 파리의 주요 관광명소와 대로변에서 킬로숍을 흔히 볼 수 있다. 현재 파리 중심부에만 킬로숍이 열 곳 넘게 생겼다.

패션 관련 협회 ‘APUR’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고물가에 따른 시민들의 얇아진 지갑 등으로 2020∼2023년 파리의 패션 관련 상점은 621곳 폐업했다. 같은 기간 중고 의류상점은 67곳이 새로 문을 열었다.

킬로숍은 규모에서 커지고 판매하는 품목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날 찾은 킬로숍은 250㎡ 규모로, 3개 층으로 대형 의류매장 못지않았다. 아이 옷과 모자는 물론이고 정장, 청바지, 파티복 등 성인들이 나이에 맞게 골라 입을 수 있는 다양한 의류가 진열돼 있었다. 그래서인지 10대부터 고령층까지 고객이 다양했다.

프랑스 파리의 중고 의류 매장 ‘킬로숍’ 한쪽에 있는 저울. 옷의 무게에 따라 돈을 지불한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옷마다 빨강, 초록, 파랑, 주황 원형 표시가 달려 있었다. 옷을 품질에 따라 나눈 일종의 가격표다. 빨강 표시는 여러 벌을 모아 kg당 20유로에, 초록 표시는 kg당 30유로에 파는 식이다. 옷들은 품질에 따라 kg당 20∼60유로(약 3만∼9만 원)씩에 판매되고 있었다.

유럽 곳곳에서 ‘킬로숍 장터’도 열린다. 중고 의류 판매기업 ‘비노킬로’는 프랑스 파리, 몽펠리에, 르망 등은 물론이고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에서 중고 옷 판매 이벤트를 연다. 온라인으로 구매한 티켓으로 대형 행사장에서 며칠간 열리는 장터에 가면 중고 옷을 kg당 구매할 수 있다. 옷을 행사장에 기부하면 최대 20%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일부 킬로숍 매장은 ‘고급화’도 추구한다. 생제르맹 거리에 있는 킬로숍에는 한쪽에 ‘빈티지 의류’ 코너가 있었다. 고가의 양질 브랜드를 중고로 파는 장소다. 영국 명품 의류 브랜드 ‘버버리’ 전용 코너도 따로 마련됐다. 베이지색 체크무늬 버버리 재킷들이 70유로(약 10만5000원)대에 팔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서 만난 70대 여성 제네나 씨는 “신제품은 600∼1000유로(약 90만∼150만 원)에 사야 하지만 이곳에서 200유로(약 30만 원)에 샀다”고 했다. 다만 일부 소비자는 이 매장의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다.

● 생활비 아끼고, 환경도 보호

파리는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와 함께 ‘세계 4대 패션도시’로 꼽힌다. 이런 파리에서조차 중고 의류매장이 성장하는 배경에는 지속되는 고물가가 있다.

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에너지 및 원자재 값이 급등한 여파다. 지난해 프랑스의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3%에 달했다. 올 들어 상승률이 2∼3%대를 기록하고 있지만 지난해와 비교해서 상승 폭만 다소 둔화됐을 뿐 상승세 자체는 여전하다.

상당수 젊은층을 중심으로 ‘옷 폐기물을 줄여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진 것도 중고 의류매장의 증가에 기여했다. 영국 상업폐기물 관리 기업 ‘비즈니스웨이스트’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섬유폐기물은 연평균 9200만 t에 이른다. 의류 제작, 폐기 관행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2030년까지 세계적으로 연간 1억3400만 t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최근 ‘올드머니룩’의 전 세계적 유행이 중고 의류 매장의 성장에 한몫하고 있다. 올드머니룩은 부유한 집안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옷장에서 꺼낸 듯한 빈티지 패션 트렌드를 말한다.

이런 수요를 노려 아예 명품만 고급스럽게 취급하는 명품 중고매장도 생겨났다. 펜디, 구찌 등 명품 중고 제품을 취급하는 ‘레트로’는 2020년 팝업 스토어를 연 뒤 좋은 반응을 얻자 올해 상설 매장을 신설하기로 했다.

중고 명품을 판매하는 ‘모노그램 파리’ 또한 온라인에서 성장한 후 오프라인 매장으로 영업을 확대했다. ‘모노그램 파리’의 인스타그램을 구독하는 사람은 24만 명을 넘는다. 이 기업은 다른 중고 매장과 달리 명품을 사고팔려는 소비자들에게 자유롭게 질문을 받고 컨설팅을 제공해 차별화했다. BFM TV방송은 “모노그램 파리 이용자들의 결제액은 평균 1000유로(약 150만 원)”라며 결제액 또한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고 보도했다.

● 정부, 수선비 최대 60% 지원

프랑스 당국은 옷 수선비 지원에 나섰다. 정부가 인증한 수선 집에서 옷을 수선하면 수선비의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다. 정부가 기존에 전자기기 수리에 지원하던 지원금을 의류 분야로 확대하는 것이다. ‘수선 보너스’라는 이름이 붙은 이 정책이 지원하는 품목은 2019년 1600만 개였지만 2028년까지 2160만 개로 늘리기로 했다.

지원금은 수선비가 12유로(약 1만8000원)를 넘어야 받을 수 있다. 의류의 안감을 복잡하게 수선하면 25유로(약 3만7500원), 신발에 패드를 달 때 8유로(약 1만2000원)를 주는 식이다. 한 품목을 여러 번 수선해도 매번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다만 단순히 옷 크기를 줄이거나 늘리는 수선은 제외된다. 또 할인 총액이 전체 수선비의 60%를 넘어설 순 없다.

정부가 수선비 지원에 나선 이유는 물가가 전반적으로 오르며 옷 수선비조차 비싸졌기 때문이다. 파리의 한 수선집 앞에서 만난 시민 콜레트 씨는 “옷값을 아끼려 옷을 거의 사지 않으려 한다”며 “옷 수선에도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수선은 항상 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전했다.

‘패스트패션’의 급성장으로 늘어난 의류 폐기물을 줄이려는 취지도 있다. 이에 따라 수선비 지원을 위한 재원은 섬유 기업, 신발 제조기업 등이 지불하는 환경 기부금에서 조달한다.

당국의 지원에 옷을 고쳐 입는 사람 또한 늘었다. 수리기금 지원 단체 ‘리패션’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이후 약 5개월간 지급된 지원금은 230만 유로(약 35억 원)를 넘어섰다. 고급 백화점 ‘봉마르셰’ 근처에서 ‘바늘의 기술’이란 옷 수선집을 경영하는 기니 무스타가 카말 사장은 “수선 요청이 너무 많아 거절하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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