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린과 허영인 [한겨레 프리즘]

박태우 기자 2024. 4. 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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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노동행위 사과 등을 요구하며 2022년 3월28일부터 53일째 서울 양재동 에스피씨(SPC) 본사 앞에서 단식농성을 한 임종린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앞줄 왼쪽)이 2022년 5월19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단식을 중단하겠다고 밝히던 중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박태우 | 노동·교육팀장

“어차피 그만둘 생각으로 제보한 것이었는데요,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에스피씨(SPC)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불법파견 의혹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이 이뤄지던 2017년 여름, 어느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임종린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파리바게뜨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노조를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괜찮겠냐”고 물으니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로부터 7년 가까운 세월을 되짚어보면 숱한 ‘별일’들이 있었다. 임 지회장은 53일 동안 단식을 했고, 허영인 에스피씨그룹 회장은 구속됐다.

7년 전, 임 지회장을 포함한 파리바게뜨 가맹점에서 일하던 제빵기사들은 가맹본부인 파리크라상도, 가맹점도 아닌 협력업체 소속이었다. 가맹점 제빵기사들은 허 회장이 매장을 둘러보다 ‘케이크가 없다’고 하는 바람에 출근 시간이 앞당겨지는 등 파리크라상 직원들의 시시콜콜한 지휘·감독에 시달렸다. 협력업체들의 임금 체불도 숱했다. 임 지회장은 당시 정의당(현 녹색정의당)이 운영하던 노동상담소에 불만을 제보했고, 한겨레에 보도되면서 노동부의 대대적인 근로감독이 진행됐다. 노동부가 제빵기사 불법파견을 인정해, 제빵기사 5300여명을 파리크라상에 직접 고용하라고 시정 지시했지만, 에스피씨는 자회사(현 피비파트너즈) 고용을 고수했다. 2018년 1월, 노조와 에스피씨, 정당,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자회사 고용 대신 3년 안에 임금을 파리크라상 정규직 수준으로 맞춘다는 합의였다.

증여세를 회피하려 계열사 주식을 저가에 팔도록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지난 2월2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파리바게뜨지회의 조합원 수는 급감했다. 에스피씨가 관리자를 동원해 ‘민주노총에 있으면 승진 못 할 수도 있다’ ‘네가 탈퇴 안 하면 내가 힘들어진다’는 각종 회유와 협박으로 파리바게뜨지회 조합원들을 탈퇴시키고, 회사 지시에 따라 설립된 한국노총 피비파트너즈노동조합(피비노조)에 조합원을 몰아줬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 이행을 요구하는 파리바게뜨지회에 에스피씨는 어용노조를 스피커 삼아 대응했다. 임 지회장이 사옥 앞에서 단식을 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피비노조는 파리바게뜨지회를 ‘조합원 선택을 받지 못한 노조’라고 비하했고, 불매운동 동참 시민에게는 ‘모리배’라고 했다.

검찰 수사로 허 회장부터 황재복 에스피씨 대표이사까지 줄줄이 구속됐지만, 파리바게뜨지회가 이들을 고소한 지 무려 3년이 지난 뒤였다. 노동부는 압수수색조차 하지 않았고, 뒤늦게 검찰이 나선 뒤에야 전말이 드러났다. 수사가 제때, 제대로만 됐어도 임 지회장이 단식을 할 이유도, 파리바게뜨지회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밀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용노조와 회사의 비난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의심하고 자책하는 시간도 없었을 터이다.

에스피씨의 ‘복수노조 활용 노조와해’는 앞서 유성기업, 삼성에버랜드 등에서 드러난 바 있다. 20년 전인 2004년, 사용자단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노조에 대응하기 위해 “전략적 복수노조 설립”을 통해 “노노 갈등과 분열(을) 활용”한다거나, “강성 노조에 대한 암묵적 차별 등으로 강성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와해시키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이러한 부당노동행위 ‘공식’이 활용된다는 의심이 들면, 적극적인 수사가 필요한데도 노동부와 검찰은 애써 눈을 감아왔다.

노동자들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은 헌법이 정하는 기본권이다.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누구도 부정하지 않듯 ‘노조 할 권리’도 같은 선상에서 인식돼야 한다. 임 지회장이 그랬듯, 여느 직장인들도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면 ‘노조’를 떠올린다. “중소기업에서는 노조를 만들어봐야 실익이 없다”(지난 4일 윤석열 대통령)며 미조직 노동자를 지원하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라, 노조 활동을 탄압하는 사용자를 엄벌하고 노조 할 권리를 두텁게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헌법 정신에 부합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화’ 대책이다. 임 지회장과 노조를 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별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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