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선대회장 5주기…대한민국 항공산업 변화의 나침반 될 리더십
조양호 한진그룹 선대회장이 타계한지 5주기를 맞았다. 조양호 선대회장이 세상과 이별하자마자 대한민국 항공업계는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았고, 5주기를 맞은 지금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필두로 항공업계 재편이라는 큰 기회를 앞두고 있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1974년 12월 대한항공에 입사한 이래 항공·운송사업 외길을 45년 이상 걸어온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국내·외를 통틀어 조양호 선대회장 이상의 경력을 지닌 항공·운송 전문가를 찾기 어렵다. 게다가 정비, 자재, 기획, IT, 영업 등 항공업무에 필요한 전 부서들을 두루 거쳐 실무까지 겸비했다. 항공·운송 관련 모든 시스템을 정확히 이해하는 엔지니어라는 의미다.
한 길만 오롯이 걸어온 전문성과 먼저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은 조양호 선대회장을 국제 항공업계에서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큰 변화를 앞둔 지금, 글로벌 항공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양호 선대회장의 경영 궤적을 차분히 따라가보는 것은 앞으로 대한민국 항공업계가 나아갈 방향에 나침반이 되고 있다.
하지만 조양호 선대회장은 선친인 조중훈 창업주와 함께 줄일 수 있는 원가는 줄이되, 시설과 장비 가동률은 오히려 높이는 전술을 구사했다. 항공기 구매도 계획대로 진행했다. 불황에 호황을 대비한 것. 결국 이와 같은 결단은 오일쇼크 이후 새로운 기회로 떠오른 중동 수요 확보 및 노선 진출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1997년 외환 위기 극복 과정도 눈여겨볼 만 하다. 외환위기 당시 대한항공 운영 항공기 112대 중 임차기는 14대뿐, 대부분이 자체 소유 항공기였다. 이에 따라 매각 후 재임차 등을 통해 유동성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고, 이는 IMF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됐다.
뿐만 아니라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에 보잉737NG(Next Generation) 주력 모델인 보잉737-800 및 보잉737-900 기종 27대에 대한 구매 계약을 체결한 것도 큰 결정이었다. 보잉은 감사의 뜻으로 계약금을 줄이고, 금융까지 유리하게 주선하게 된다. 결국 이들 항공기들은 대한항공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차세대 항공기 도입 결정도 마찬가지다. 2003년은 이라크 전쟁, SARS 뿐만 아니라 9.11 테러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세계 항공산업이 침체의 늪에 빠진 시기였다. 하지만 조양호 선대회장은 이 시기를 차세대 항공기 도입의 기회로 보고, A380 항공기 등의 구매계약을 맺었다. 이와 같은 조양호 선대회장의 예견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2006년 이후 세계 항공시장은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항공사들은 앞다퉈 차세대 항공기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공기 제작사가 넘치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해 새로운 항공기 도입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으로 반전된 것. 물론 대한항공은 이와 같은 선제적 결정으로 적기에 차세대 항공기들을 도입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세계 항공업계는 동맹체로 재편됐다. 유나이티드항공은 ‘스타얼라이언스(Star Alliance)’를, 아메리칸항공은 ‘원월드(One World)’를 각각 창설했다. 이미 조양호 선대회장은 세계 항공업계가 동맹체로 재편되고 있는 변화의 흐름을 읽었다. 이에 2000년 조양호 선대회장 주도로 대한항공,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등 4개 항공사는 스카이팀(SkyTeam)을 출범시켰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 항공사들을 스카이팀 회원사로 영입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함께 신규 스카이팀 회원사들을 위해 업무 표준화와 기술 자문을 통해 스카이팀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조양호 선대회장의 노력으로 2020년 4월 현재 스카이팀은 19개 회원사가 170개국 1,036개 취항지를 연결하는 글로벌 항공 동맹체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항공시장의 경쟁은 더욱 거세졌다. 게다가 2011년부터 아메리칸항공-일본항공, 유나이티드항공-전일본공수의 조인트 벤처로 인해 핵심 허브였던 인천공항이 위상이 점차 약화됨에 따라 대한민국 항공산업 핵심 경쟁력인 환승 수요도 하락 추세였다.
이러한 시점에 조양호 선대회장은 강력한 협력관계를 통한 시너지 효과 창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향후 항공사간 전략적 협력이 활성화될 것을 앞서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반독점면제(ATI, Anti-trust Immunity) 권한도 미리 취득해 놓은 터였다.
이에 따라 2018년 5월 닻을 올린 델타항공과의 태평양노선 조인트벤처는 치열한 글로벌 항공시장 경쟁을 뚫는 창이 되고 있다. 특히 2018년과 2019년 대한항공이 견고한 실적을 내는 데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조양호 선대회장은 전 세계 120개국 287개 민간 항공사들이 회원인 국제협력기구인 국제항공운송협회(International Air Transport Association, 이하 IATA)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IATA 최고 정책 심의 및 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BOG, Board of Governors) 위원이자, 31명의 집행위원회 위원 중 별도 선출된 11명의 전략정책위원회(SPC, Strategy and Policy Committee) 위원으로서, IATA의 주요 전략 및 세부 정책 방향, 연간 예산, 회원사 자격 등의 굵직한 결정을 주도했다.
이와 같은 조양호 선대회장의 위상은 명실공한 ‘항공업계의 UN 회의’라고 불리는 IATA 연차총회를 지난해 사상 최초로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할 수 있었던 동인이었다. 서울 IATA 연차총회는 대한민국 항공산업이 변방이 아닌 전 세계의 중심이 됐다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한항공이 안전 부문에 쏟고 있는 예산은 연간 1000억원을 훌쩍 넘는다. 직원들의 교육 훈련 및 최신 장비 구입, 안전과 관련한 글로벌 트렌드를 수집하기 위한 해외 세미나 참석 등 다양한 부문에 활용된다.
대한항공의 이 같은 철저한 안전관리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항공안전의 척도인 보험요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대한항공은 항공 선진국인 미주, 유럽 지역의 대표 항공사들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사고를 비롯한 안전관련 데이터가 모두 반영되어 누적 적용된 항공보험요율은 바로 항공안전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으며, 대한항공의 보험요율 하락은 그만큼 ‘더 안전한 항공사’라는 증거다. 사고를 많이 내는 운전자가 자동차 보험료를 많이 내는 것처럼, 항공보험요율이 낮으면 항공안전도가 높다는 의미다.
조양호 선대회장이 생전 끊임없이 집중했던 ‘안전’은 대한항공이 어떠한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든든한 근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조양호 선대회장이 생전 보여준 기본에 충실야 한다는 가르침, 그리고 합리적인 경영 리더십은 이미 국내 항공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경영자는 시스템을 잘 만들고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하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율을 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시스템 경영론’, 고객과의 접점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현장이며 최상의 서비스야말로 최고의 항공사를 평가 받는 길이라는 ‘고객중심 경영론’ 등 조양호 선대회장의 경영철학은 세월이 변해도 결코 변치않는 가치다.
조양호 선대회장이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시켜낸 족적, 위기를 헤쳐나와 오히려 이를 기회로 만든 노하우와 혜안은 큰 힘이다. 지금 대한민국 항공업계가 치열한 글로벌 경쟁을 뚫고 살아남느냐 이를 뛰어 넘느냐가 걸린 시점에 조양호 선대회장의 발자취는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
이상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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