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대, 다시 돌아보는 ‘조양호 경영’…故 조양호 5주기 맞아 평전 출간

박재명 기자 2024. 4. 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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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5주기 조양호 경영 재조명
정비부터 영업까지 항공 ‘르네상스 맨’
위기를 기회로 만든 승부사
조양호 한진그룹 선대회장의 흉상 뒤로 8일 출간된 그의 평전 ‘지구가 너무 작았던 코즈모폴리턴’이 놓여 있다. 한진그룹 제공
8일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선대회장의 일대기를 정리한 평전 ‘지구가 너무 작았던 코즈모폴리턴’이 출간되면서 조 선대회장의 리더십과 경영철학이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2019년 타계해 올해 5주기를 맞은 조 선대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 입사 이후 45년 동안 항공·운송사업 ‘외길’을 걸었다. 특히 정비, 자재, 기획, 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분야를 두루 거쳤다. 국내외에서 지금까지도 조 선대회장 이상의 경력을 가진 항공·운송 전문가를 찾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최근 항공업계에서는 코로나19 위기 이후 산업 격변이 이뤄지고 있다. 이 때문에 “조 선대회장의 경영을 다시 되새겨 보자”는 목소리가 커진다. 평전 등을 통해 조 선대회장이 중요 시점마다 단행했던 경영 결정을 짚어 본다.

오일쇼크에 항공기 구매…위기를 기회로 만든 ‘승부사’

조 선대회장이 처음 대한항공 근무를 시작한 1974년은 1차 오일쇼크가 한창이었다. 1978~80년에도 2차 오일쇼크가 닥쳤다. 연료비 부담으로 인해 당시 미국 최대 항공사였던 팬암과 유나이티드항공이 직원 수천 명을 감원할 정도였다.

조 선대회장은 선친인 조중훈 대한항공 창업주와 함께 ‘줄일 수 있는 원가는 줄이되, 시설과 장비 가동률은 높이는’ 전술을 구사했다. 항공기 구매도 예정대로 진행했다. 불황에 호황을 대비한 이 결정은 오일쇼크 이후 새로운 기회로 떠오른 중동 수요 확보 및 노선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항공 항공기 앞에 선 조양호 한진그룹 선대회장. 조 선대회장은 위기 상황에서 항공기 투자 등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리더십을 보여 줬다. 한진그룹 제공

1997년 외환위기도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경우다. 1997년 당시 대한항공이 운영하는 항공기 112대 가운데는 자체 소유 항공기가 98대에 달했다. 조 명예회장은 노후기를 중심으로 ‘매각 후 재임차’로 유동성을 확보했다. 동시에 투자도 단행했다. 대한항공은 1998년 미국 보잉사와 보잉737-800 및 보잉737-900 27대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보잉은 대한항공에 감사의 의미로 계약금을 줄이고, 유리한 조건의 자금 조달을 주선해 줬다. 해당 항공기들은 이후 대한항공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차세대 항공기 도입 결정 역시 마찬가지다. 조 선대회장은 2003년 A380 항공기 등의 구매계약을 맺었다. 당시는 이라크 전쟁과 9‧11테러의 영향 등으로 전 세계 항공산업이 침체기였다. 조 선대회장이 항공기 구매를 결정하자 국제 항공업계에선 “무모한 구입”이라는 우려가 쏟아졌다. 하지만 2006년 이후 항공시장이 회복세로 돌아섰을 때 대한항공은 신규 항공기를 즉각 활용했지만 다른 항공사들은 새로운 항공기 도입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경쟁 격화에는 ‘협력 증대’로 대처

2000년 전후 세계 항공업계가 동맹체제로 개편된 것은 기존 항공사에게 위기였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항공시장은 ‘레드오션’으로 바뀌고 있었다. 조 선대회장은 바뀌는 시장 상황에 맞서는 방법으로 항공사 간 협력을 택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선대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등 스카이팀 최고경영자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있다. 조 선대회장은 경쟁 격화에 ‘우군’을 늘리는 협력 증대로 대처했다. 한진그룹 제공

시작은 ‘스카이팀’의 창설이었다. 2000년 조양호 선대회장 주도로 대한항공,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등 4개 항공사가 스카이팀을 출범시켰다. 대한항공은 세계적 항공 동맹체인 스카이팀 설립을 주도하면서, 2000년대에 명실상부하게 글로벌 선도 항공사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2020년 4월 현재 스카이팀은 19개 회원사가 170개국 1036개 취항지를 연결하는 글로벌 항공 동맹체로 성장했다.

조 선대회장은 또 항공사간 전략적 협력이 활성화될 것을 예상하고 반독점면제(ATI) 권한을 미리 취득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를 통해 2018년 5월 시작한 델타항공과의 태평양 노선 조인트벤처는 2018, 2019년 대한항공 실적에 큰 역할을 했다.

한편 대한항공에 ‘안전 경영’을 각인시킨 것도 조 선대회장이다. 조 선대회장은 1997년 괌 사고 이후 20년 동안 1조 원 이상을 안전에 투자했다. 지금도 대한항공은 연간 1000억 원 넘는 돈을 안전 예산으로 사용한다. 조 선대회장의 측근이었던 대한항공 직원들은 “조 선대회장이 항상 ‘안전에 협상은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항공 위상 높인 항공업계 거인(巨人)

조 선대회장과 관련해서는 ‘국제 항공업계의 거인’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사용된다. 그만큼 넓은 인맥과 해박한 실무 지식으로 국제 항공업계를 오랜 시간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조 선대회장은 세계 120개국, 287개 민간 항공사가 회원으로 있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집행위원회 위원을 18년 동안 역임했다. 또 11명뿐인 IATA 전략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IATA의 주요 전략과 정책 방향, 연간 예산 등의 굵직한 결정을 주도한 바 있다.

2019년 6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항공업계의 UN 회의’라고 불리는 제75회 IATA 연차총회가 개최된 데도 조 선대회장의 국제 네트워크가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그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 개최 두 달을 앞둔 2019년 4월 타계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측은 “서울 IATA 연차총회는 대한민국 항공 산업이 전 세계의 중심이 됐다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조 선대회장이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시킨 족적이나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기회를 만든 혜안은 지금 우리 항공업계에도 적지 않은 가르침을 준다”며 “조 선대회장이 생전에 보여준 경영 리더십이 앞으로 국내 항공업계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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