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종 칼럼] ‘사유의 부재’에 빠진 내 탓 없는 정치
총선을 앞두고 곳곳에 내건 현수막을 보면서 문득 오래전에 읽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생각났다. 전쟁 이후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 받는 과정을 다룬 그 책에 따르면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했지만 자신은 단지 “국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면서 무죄를 주장했다.
오늘날 ‘아이히만의 항변’으로도 유명한 이 말은 당시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전형이라고 분석하면서 그가 유죄인 까닭은 유대인에 대한 엄청난 악행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 때문이라고 힐난했다.
굳이 이 말을 소환하는 것은 이번 총선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라는 근대사에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원인이 남의 탓이라고 돌리는 ‘사유의 부재’에 기인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유권자 무시 현상이 깊은 정치 영역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총선의 시대적 의미는 선택된 정치세력이 새로운 개혁과제들을 발굴하고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정책과 정치를 펼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미래 국가의 명운을 가를 수 있는 중차대한 변곡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여야 모두 한결같이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고 후보자들의 면면 역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공약은 달콤하지만 재정이 거덜날 것 같고 후보자들의 전과자 비율은 3명 중 1명이다. 한강물이 더 깨끗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유권자들을 우습게 보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후보가 많다.
솔직히 유권자들은 권리를 포기할 수 없어 ‘최악’보다는 ‘차악’을 뽑고자 하지만 누가 나라를 떠받칠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판단하기 쉽지 않은 처지다. 국민은 안중에 없는 ‘사유의 부재’ 현상이다.
어쩌면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쪽이 이기든 나라의 혼란은 이전보다 더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이념 편향적 갈등으로 정치가 양분되고 국민과 지역 간의 불신과 반목이 더 깊게 전개될 수도 있다는 걱정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듯하다.
더구나 국가의 정체성마저 진보와 보수 이념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은 그동안 국가 발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념 간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선거 이후 위기가 뻔히 보이는 이유다.
그래서 이번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이 해야 할 일은 국민들보다 잘나 보이고 높아지고 싶은 정치인들이 평범하고 선량한 민초들의 생각을 저버리는 사유의 부재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선거가 정치적 경쟁이어도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총선에서 이기겠다는 무책임한 후보와 내 잘못보다는 국민 탓으로 돌리는 위선적이고 자위적인 후보의 선택으로 이어져서는 결코 안 된다.
‘선거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 정치의 수준이 낮은 것이 후보자들보다 오히려 유권자들의 수준 때문이라는 비판은 최소한 듣지 말아야 한다.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반대세력을 멸절(滅絶) 시키라는 게 아니라 일체와 화합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새로운 차원의 경제적, 안보적 위기에 봉착하고 또다시 깊고 혼란스러운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것은 유권자들이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고 책임이다.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국가 질서의 확립’으로서 선거가 또다시 ‘정치적 양극화와 세력 간의 충돌’로 야기되고 혼란과 갈등의 강으로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단순한 기우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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