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볼 여왕이 스리쿠션 여제로…“내 자리 넘보려면 더 노력하라”
김가영(41·하나카드)은 최근 막 내린 LPBA(여자프로당구) 2023-24시즌 여자 최강자로 우뚝 섰다. 맨 마지막 왕중왕 대회인 월드챔피언십과 휴온스 LPBA챔피언십,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총 상금(1억2050만원)과 베스트 애버리지, 뱅크샷, 팀 리그 우승과 함께 대상까지 받아 5관왕 영예를 차지했다. 10대 시절부터 ‘작은 마녀’라 불리며 세계 여자 포켓볼 무대를 휩쓸던 그가 스리쿠션에서도 자타공인 최정상에 오른 것이다. 최근 경기도 고양 킨텍스 근처에 차린 개인 연습장에서 김가영을 만났다. 김가영은 지난해 PBA 경기장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30평 규모의 개인 연습장을 차려 놨다. 실제 경기에서 쓰는 당구대 2대에 전광판까지 갖춰 마치 미니 당구장을 연상케 한다.
-PBA 경기장 근처에 개인 연습실을 따로 차린 이유는.
“선수가 경기력을 위해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다. 처음 LPBA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땐 초보자로서 배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제 개인적인 연구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작년에 마련했다. 훈련에 정해 놓은 시간은 따로 없다. 그런데 한번 몰두하면 14~15시간 동안 친 적도 있다. 아침에 와서 연습하다 밥 먹고, 다시 연습하고…. 휴식 때 취미로 칠 피아노나 잠시 눈 붙이는 해먹도 갖다 놨다. 수 천만 원 들였다. 잠은 반드시 집에서 잔다. 최근 인천에서 훈련장 근처로 이사 왔다.”
-포켓볼에 이어 스리쿠션에서도 최고에 오른 기분이 남다를 텐데?
“5년 전 처음 스리쿠션 선수 생활 시작했을 때 열심히만 하면 어느 정도는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3년 잡았다. 매년 꾸준하게 성적을 냈다. 최근 3년간 리그 랭킹도 1위 였다. 2년 전에도 왕중왕전 우승을 했다. 올해는 단체전까지 우승하면서 남들이 못 이룬 5관왕까지 했다. 앞으로 누구라도 쉽게 못 이룰 기록 같다. 그래서 이번 시즌을 마친 기분이 너무 좋다.”
-사람들은 ‘김가영이 우승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런 얘기 수없이 들었다. 내가 실수만 조금 해도 포켓볼 챔피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런 말에 스트레스 받기 싫어 사람도 잘 안 만나게 되더라. 난 포켓볼 챔피언이었지만, 스리쿠션은 5년 차 초짜다. 아직도 내 실력이 불안하다. 이번 왕중왕전 예선 1차전 애버리지(이닝당 평균 성공 개수)가 2점대였는데, 2차전에선 0.6점대로 뚝 떨어졌다. 토너먼트였다면 탈락했을 것이다. 포켓볼 애버리지는 꾸준한데, 스리쿠션은 아직 기복이 심하다. 나와 랭킹 1위를 다투는 스롱 피아비와 맞대결에선 내가 아직 밀린다. 피아비는 2020년 LPBA에 들어왔지만 이미 아마 시절부터 일인자였다. 이미래도 내게 많은 패배를 안겼다. 그런데 내가 진 것보다 구력 긴 그들을 이기는 게 더 훌륭한 거라고 생각한다.”
-포켓볼과 스리쿠션이 어떻게 다른가.
“피겨 스케이트 잘한다고 스피드 스케이팅도 잘하는 건 아니지 않나. 당구는 예민하다. 다른 사람이 내 큐를 1초만 만져도 금세 안다. 스리쿠션과 포켓볼은 큐 성질, 공의 크기나 무게가 전혀 다르다. 적응하느라 애 먹었다. 플레이 방법도 다르다. 포켓볼은 내 표적구가 어디로 가는지 파악해야 하고, 스리쿠션은 내가 친 공의 길을 봐야 한다.”
-스리쿠션으로 전향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포켓볼 하면서 몸에 굳어진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습관을 지키고, 버려야 할지 판단하는 게 어렵다. 포켓볼에서 스리쿠션으로 전향한 전례가 없어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번 시즌 때도 남의 얘기 듣다가 한동안 고생했다. 하지만 내게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한다.”
-경기 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한다.
“강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아직도 욕 많이 얻어먹는다. 당구 칠 때 웃으면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내가 봐도 사이코패스처럼 보인다. 그런 주위 편견 때문에 20대 초반에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약한 멘털 숨기려고 옷도 화장도 일부러 강하게 한 적도 있다. 공부도 하고, 조언도 듣고, 트레이닝도 받으면서 이젠 좀처럼 잘 안 흔들리는 나만의 노하우가 어느 정도 생긴 것 같다. 남이랑 싸우는 경기는 재미있다. 경기에서 지면 속상하고 화가 나지만, 한 30분 정도 지나면 잊힌다. 오히려 수천 번을 연습하는데도 생각대로 안 될 때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죽고 싶을 때도 있다. 왠지 안전하고 편해지는 것 같아 당구대 밑에 기어들어 가 운 적도 있다. 남보다는 나랑 싸우는 게 너무 힘들다. 끝이 없는 싸움 같다.”
-포켓볼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가.
“어렸을 때부터 여자 당구 선수로서 먹고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포켓볼이었다. 고교 졸업 후 미국과 대만에서 온갖 질시를 견뎌내면서 챔피언이 됐다. 그렇게 국제적 인지도를 높인 포켓볼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전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5년 전 외부 환경 때문에 그 길이 막혀버렸다. 학교(한국체대)에서 석사 논문(체육철학 전공) 준비할 때였다. 학업을 이어가면서 포켓볼 지도자를 할지 고민하다가 스리쿠션 선수의 길을 택했다. 후회는 없다. 새 길을 가기로 했으니 기회를 최대한 잘 살려야 한다.”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할 생각인가?
“내가 포켓볼을 계속했다면 지금 목표로 한 10계단 중 한 8~9계단은 갔어야 정상이고, 그럼 지금쯤 은퇴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스리쿠션 5년 차인 나로선 아직 한 서너 계단 정도 올라온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이와는 관계없이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래야 투지가 생긴다. 가장 먼저 여자 선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다.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여자 선수들은 애버리지 1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내 애버리지가 이제 1이 넘는다. 좀 더 노력하면 여자들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1.3~1.4점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남자선수 실력을 넘어서지는 못해도 지금보다 훨씬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실력이 톱 클래스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그만둘 것 같다. 하지만 아직 할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다.”
-김가영을 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저 언니는 포켓볼에서도 많이 해 먹더니 스리쿠션 와서 우리 밥그릇까지 뺏는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난 언제든지 자리를 내줄 준비가 돼 있다. 나를 넘어서기 위해선 후배들도 노력해야 한다. 난 잘되든 안 되든 무슨 일이 있어도 훈련을 꾸준하게 했다. 회사원이 몸 아프다고 회사에 안 나갈 수 없는 거 아닌가. 난 공 다루는 재능보다는 생각하고 고민하는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훈련을 꾸준하게 하고,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체력 훈련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꾸준하게 노력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자기 것으로 다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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