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 이전투구 속, 진보정당의 자리는 없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2024. 4. 9.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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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칼럼] 진보정당 운동, 실패 위에서 재출발 기회 가져야

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을 하루 앞둔 지금, 진보정당이 원내에 남을지 그렇지 않을지가 여러 사람의 관심사다. 주변을 돌아보니, 오랜 시간 민주노동당·진보신당·정의당 같은 진보정당에게 한 표를 던져주던 한 60대 시민의 경우 '이번에는 진보정당에 투표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류호정 전 의원의 기이한 행보가 그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듯하다. 한 30대 여성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녹색정의당에 대한 투표를 머뭇거렸다. 또 다른 50대 남성의 경우 녹색정의당이 이념적으로 매우 못미더울 뿐만 아니라 위기의 시대에 부합하는 급진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는 표를 행사할 수 없겠다고 밝혔다.

돌이켜보면 류호정의 진보 비판은 대체로 일관성을 보이지 않았다. '정의당이 민주당에 충분히 비판적이지 않다'는 비판은 종종 타당했지만, 노동운동을 비판할 땐 보수언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지난 12월 자신이 속한 의견그룹 '세번째권력' 성원들이 이준석 신당의 품으로 갈 때에도 내내 탈당하지 않고 버티다가 여론의 역풍이 일자 1월 말에 가서야 탈당계를 제출했다. 물론 기존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지지 철회에는 류호정이 낳은 정치적 환멸감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짧은 시간 내에 해소될만한 쟁점은 아닌 것 같다.

한편 조국혁신당의 비례대표 지지율이 20퍼센트를 넘는 것으로 나타나자 5060 지식인층 지지자들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기득권 정치를 흔쾌히 예찬하기 어려웠음에도 민주당 왼쪽에 있는 진보정당들보다는 민주당에게 한 표를 행사해온 이들의 입장에서 조국혁신당의 새롭고 세련된 이미지, 윤석열 정부에 강경하게 맞설 것처럼 보이는 스탠스는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예컨대 정태석 전북대 교수가 지난 4월 6일 페이스북에 쓴 글에는 이런 이들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정태석 교수는 2016년 탄핵 촛불 이후 보수양당 체제가 "보수-중도개혁 양당체제로 전환됐다"고 평가하면서, 진보정당의 독자노선과 차별화를 지향하는 '급진그룹'이 "자신들의 부분적 성공에 고무되어 잘못된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고 자의적으로 규정했다. 정태석은 또 "급진그룹은 비례대표 선거에서 자신들을 지지한 시민들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급진그룹이 주축이 됐다니? 그 급진그룹이 자신들을 지지한 시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니? 어떤 데이터나 조사를 근거로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규정은 기초적인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아마 정의당 사정을 잘 아는 내부 인사나 당원들이 들으면 뜬금없는 소리라고 일갈할 것이다. 창당 이래 정의당 지도부는 그게 누구건 항상 온건파이자 실리파에 속했다. 가령 급진그룹으로 분류되는 인사는 당내 경선에서 언제나 3등 이하를 차지할 정도로 역량이 크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전의 민주당보다 개혁적인 이미지를 생산했는지는 몰라도, 이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를 도입했고, 노무현 정부는 파견법을 도입했다. 소득불평등과 빈부 격차는 여느 때보다 극심해졌다. 대중은 이를 몸으로 느꼈고, 진보와 개혁세력에게 '복수'했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당선되던 당시 열성 민주당 지지자들은 가난하고 학력이 낮은 사람일수록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투표했었다는 사실을 두고 비난과 조롱을 쏟아낸 바 있다. 아무리 승리에 취해 있다고 해도 지난 과거를 망각하거나 왜곡해선 안 되는 일이다.

이에 더해 정태석은 민주당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중도개혁정당으로 전환됐다"고 평가한다. 그러니까 김대중-노무현에 의해 개조된 민주당은 이전보다 왼쪽으로 왔지만, 녹색정의당은 "20년이 넘도록 (…) 여전히 운동권 정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 지지자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체 '운동권 정서'가 뭘까? 안 그래도 창당 초기 정의당의 핵심 인사들은 심심치 않게 '운동권 정당 탈피론'을 내세운 바 있다. 정의당은 유능한 제도정당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운동권 정당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이 수사법은 '운동권'이라는 기표에 덧씌워진 '무능하고 주장만 강한 과격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한다. 기실 그것은 극우언론이나 군부 정권이 급진적인 사회운동에게 쏟아부은 부정적 수사 전략이기도 했다. 정태석이 만악의 근원으로 설정하는 '정의당 내 급진그룹'은 이런 수사 전략이 정의당과 사회운동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다고 평가한다.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이 섞인 정태석의 점잖은 주장은 '민주당에 비판적인 좌파를 비난하는 중년 지식인'의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하며, 가히 연구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실제 그는 "검찰 정권에 강력히 맞서는 것이 시급한 정치적 과제"라고 여기지만, 녹색정의당이나 사회운동 전반이 일상적으로 주창하는 불평등의 감축이나 장시간 노동·노동재해 등 노동 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해 보인다. 기후위기나 여성과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차적 과제' 수준에서라도 아무 언급이 없다. 나는 이것이 정태석이 진보정당 노선과 멀어지게 된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장시간-저임금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기후위기 문제 역시 자신과는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정태석 등의 결정적 문제는 '대중'의 구획을 정당에 가입한 사람들이나 열정적인 정치뉴스 소비층으로만 설정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열정적인 정치뉴스 소비집단은 여론의 100퍼센트가 아니며 전체 인구의 일부다. 한국 사회의 '정치뉴스 헤비유저'들은 대체로 양극화된 거대 양당 구도에 존재하는데, 다른 말로 '정치 팬덤'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런 정치뉴스 헤비유저들이 '대중 여론'의 전체로 상정되지만, 사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것과 다르다. 새벽 6시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정치뉴스에 몰입할 시간이 없다. 또 정치인들의 이전투구에도 자신의 삶은 계속 그대로라는 점을 체험하면서 냉소주의자가 된 많은 시민들은 평소에는 뉴스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뉴스가 '틱톡화'된 이후 단편적인 정보만 접하게 된 많은 20~30대 시민들 역시 민주당이나 녹색정의당 사이의 갈등 구조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니 정태석이 설정한 인과론은 대체로 일상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정치팬덤층의 서사일 뿐이다.

물론 현대 정당은 미디어의 영향으로부터 큰 구속력을 지닐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불신을 활용한 팬덤 정치의 선동에 쉽사리 흔들린다. 오랜 시간 정의당은 다른 정당들이 그러한 것처럼 정치팬덤의 비난과 지지에 완전히 종속돼 있었는데, 이러한 논리로 작동될 때 진보정당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딜레마에 휩싸이게 된다. 가령 문재인 정부 후반기처럼 노동권을 옹호하기 위한 노력이 자본의 요구 쪽으로 더 기운 민주당의 방향과 대치될 때 진보정당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지 않고 '목소리 없는'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민주당 정부와 대척점에 서야 한다.

좌파 또는 사회운동은 체제 안팎을 뒤흔들 사회운동적 역량, 즉 조직된 대중들의 운동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지배정치 또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작동하지 않을 때 대중의 불만은 저항-정치화된다. 그렇게 되면 흔히 비정치적 영역으로 간주해버리는 '비공식 영역' 내의 사회운동이 미약한 상태를 벗어나, 저항적 연대와 같은 '비공식 영역의 정치화'를 거쳐 '대항 헤게모니 정치'로 전환하게 된다.

가령 박근혜 정권 시기 비공식 영역의 사회운동이 감행한 민중총궐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그에 속할 것이다. 한데 만약 통치 엘리트들이 비공식 영역의 헤게모니마저 장악해 공식 정치의 장에서 힘의 우위를 유지하고 그 바깥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적대가 공식적 정치의 장으로 넘쳐 들어오는 것까지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사회운동의 에너지는 더 위축될 것이다.

오늘날 진보정당이 직면한 위기 양상은 이념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대항 헤게모니 운동이 신자유주의 이후 민주주의의 후퇴를 극복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치고 있음을 가리킨다. 기성정치가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 진보정당과 좌파가 다양한 대중운동의 대항 헤게모니 이니셔티브를 전취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마주한 녹색정의당의 지지율은 정치팬덤층과 민주당의 일시적인 보완제로서만 정의당을 지지해온 정치뉴스 헤비유저들의 이탈의 결과이자 "냉정한 평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태석의 말처럼 "당당하게 독자적 길을 걸어온 결과"는 아니다. 오히려 '독자적 길'을 어정쩡하게 걸어오면서, 그 사이 자신이 만나야 할 대중을 충분히 만나지 못하거나 새로운 지지층을 충분히 채워내지 못한 결과일 따름이다.

주지하다시피 진보정당이나 사회운동이 만나야 할 사람들, 정의당 식으로 말하자면 '6411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작금의 정치팬덤층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갖고 살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이제 막 노동조합을 만든 비정규직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그럴 엄두도 내기 어려운 조건에 살고 있기도 하다. 사회운동은 자신의 역량을 비약적으로 투여해 이들을 만나고 조직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물론 2016~2022년 사이 양대 노총 조합원 수의 기하급수적 증가에서 확인하듯, 가시적 성과도 있었다.)

이번 총선 뉴스를 점유하는 정치인들이 정당을 막론하고 일관되게 공유하는 점이 하나 있다면, 하나같이 '상위 1%'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78억 자산가 윤석열은 말할 것도 없고, 한동훈(39억5678만원)과 이재명(31억1527만원), 조국(53억7700만원)의 차이도 퍽 가까워 보인다. 조국이 박은정 후보(49억8200만원) 남편의 '다단계사기 고액 수임' 관련 논란에 대해 "특별히 윤석열 검찰 체제로부터 혜택을 받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나, 같은 당 강경숙 후보가 "노란봉투법은 민주노총 구제법"이라고 한 것도 이들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다. 반면 상위1% 간의 이전투구 속에서 희망과 대안을 찾았다는 정태석이 녹색정의당의 실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영 엉뚱해 보인다.

물론 정태석의 말대로 사회운동은 "조국혁신당이 왜 많은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지"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듯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여론 지형을 원망하는 것에 그쳐서도 안 된다. 대중이 "헛된 망상에 빠져있다"고 비판해서도, "질투심과 시기심"에 갇혀서도 안 된다. 대신 진보정당은 다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자신이 만나고자 했던 사람들을 주역으로 내세우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를 재개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진보당과 새진보연합 등 정당들은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에 조응하며, 진보정당이 지녀야 하는 원칙을 모두 폐기시켰다.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고 맞서 저항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지난 시기 민주당 정부들이 노동권을 축소하거나 신자유주의 시장화 정책을 강화하는 노선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돌아볼 때, '민주당 위성정당'이라는 선택은 자기 비전에 대한 완전한 폐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런 기준에 근거해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며 투표할 수 있는 정당은 안타깝게도 노동당과 녹색정의당 밖에 없어보인다. 이 정당들이 원내 정당으로 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땀흘려 노동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정당'이 여전히 존재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미래를 가름짓지는 않겠지만, 너무 험난한 길에서 재출발할 필요는 없지 않으니 말이다. 망설이는 모든 이들의 결단과 건승을 기원한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일 전날인 지난 4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녹색정의당 김준우 대표와 심상정 원내대표 등 당원들이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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