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53] 이중 학위를 가진 의과학자
‘환자를 진료하는 전문의는 연구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일반 대학원에서 순수하게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질병과 연관을 맺는 창의력이 부족하다.’ 1995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허갑범 학장이 쓴 신문 칼럼 요지다. 그는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의학-이학박사 과정’을 제안했다. 국내에서는 의과학자 과정으로 알려진, MD-PhD 이중 학위 과정이다. 최근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중 절반 가까이가 MD-PhD 이중 학위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백신이나 난치병 치료 영역에서 이들의 기여가 현저하다.
한국에도 MD-PhD 이중 학위 소유자가 많다. 한국 의사 중 상당수가 PhD 학위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2015년 의협 의료정책연구소가 낸 평가를 보면 “임상 계열 석박사 제도는 돈 주고 구입한 증서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KAIST에 있는 의과학대학원은 의사를 신입생으로 받아 생명과학이나 의공학을 가르친 뒤에 PhD 학위를 수여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연구 환경이 갖춰지지 못한 병원에서 연구를 이어 나가지 못하고 환자를 보는 임상의로 돌아간다.
미국의 의과학 과정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보통 생명과학 분야에서 연구 경력이 있는 학생이 국가 장학금을 받아 의대에 입학한 뒤에 임상 교육을 받고, 그 뒤에 과학 연구를 더 하고, 임상으로 돌아가서 훈련을 마치는 ‘샌드위치’ 방식을 채용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중 학위 과정을 마치고 대학, 국립 연구소, 기업 연구소 등 의과학 연구가 필요한 곳에서 연구를 계속 수행한다. 임상의를 하는 것보다 월급은 적겠지만, 의과학 연구에 대한 열정이 이들을 이끈다.
한 가지 정답은 없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 실정에 알맞은 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의대 증원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의과학자를 키우는 제도적 토대를 놓을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서울대학교의 의과학과 정원 신청 승인이 나지 않은 것이 그래서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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