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러 신냉전 연대, 틈새 외교로 공략해야[동아광장/전재성]
한국, 중-러에 핵 규범 중요성 강조할 필요
공통된 이익도 찾아 진영 논리 약화시켜야
지난 30년 미국 주도 탈냉전기 속 고난을 겪어온 북한에 지금의 국제 정세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현 상황을 신냉전이라 정의하고 중-러와 관계를 강화하여 핵 국가로 공인받고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신냉전 전략을 펴왔다. 앞으로 진영 논리에 따라 신냉전 전략에 올인할 것인지, 아니면 한미와 협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비핵화와 경제 발전을 추구할 것인지, 북한은 전략적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 역시 북-중-러 대 한중일의 신냉전 구도를 받아들여 진영의 장기적 승리에 힘을 쏟을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 가능한 목표로 상정하고 협상 환경 조성을 위해 외교 전략과 대북 전략을 추구할 틈새를 추구할 것인지 갈림길에 있다.
북-중-러 연대는 한국의 독자적인 비핵화 노력을 원천 봉쇄할 만큼 전혀 틈새가 없는 것일까. 국제 정세를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진영 대결로 보는 담론도 이러한 고민을 부추긴다. 첫째, 권위주의는 진영을 구성하는 이념이 되기 어렵다. 권위주의와 독재는 정치 체제의 특징을 규정하는 용어이다. 정치권력의 집중, 시민사회의 억압과 국민 자유의 제한, 법의 지배 무시 등을 기반으로 한다. 20세기 냉전을 구성했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사회, 경제, 정치, 이념을 아우르는 포괄적 체제로 진영을 구성했다. 권위주의와 독재는 정치 과정에 한정된 협소한 개념으로 권위주의 국가들끼리 진영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는 어렵다. 북-중-러 3국이 권위주의와 독재의 스펙트럼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강고한 진영을 이루어 일관된 외교정책을 추구할 것으로 볼 근거는 없다. 북한의 세습 독재와 중국의 시장사회주의, 러시아의 왜곡된 자본주의 간에 진영의 공고화를 보장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둘째, 권위주의와 독재 국가 간 협력은 이념이 아닌 이익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지도자 개인, 지배 정당의 국내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이익이 주된 동기이므로 구조적인 지속성을 가진 협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익의 연대가 공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의 장기적 이익과 시민사회의 합의, 균형과 견제 속에 신중히 형성된 연대가 아니므로 상황의 변화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전쟁을 수행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북한의 무기 개발을 지원하면서 제재 회피를 돕고 있지만, 핵 비확산이라는 중차대한 국제 규범을 하나씩 위반하게 되면 국익은 훼손되고 푸틴 대통령 개인도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주권 침해와 북-러 간 불법적 무기 거래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거리 두기를 하는 것도 서로 다른 정치적 이익 때문이다.
셋째, 공통의 적이 권위주의, 독재 국가들을 단합시킬 수 있다. 북-중-러 3국의 연대가 자본주의 패권 국가인 미국의 리더십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 국가가 똑같이 미국 주도 규칙 기반 질서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현 체제하에 성장과 성공을 일구었고, 지금도 미중 간 상호 호혜 관계를 주장하면서 규칙 기반 질서, 유엔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제국주의 담론을 구사하면서 주변 국가의 주권을 부정하고 유엔 활동을 저해하는 러시아와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미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벌이고, 주체를 강조하면서 주변국을 침공하는 러시아의 제국적 행태를 옹호하는 북한 역시 모순을 감추기 어렵다.
한국의 대북 전략은 무엇보다 북한의 신냉전 전략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북한이 진영 논리 속에 갇히면 남북협상은 불가능하다. 북-중-러 연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틈새를 보일 것이고 준비된 한국에 기회를 줄 것이다. 강대국 지정학 구도 속에 이러한 노력은 다시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연한 신냉전 정세 판단에 눌려 쉽사리 비핵화 회의론에 빠져서는 한국의 핵심 이익을 놓칠 수 있다. 군사 억제와 경제 제재를 강화하면서 중-러 양국에 핵 규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공통된 이익을 찾아 진영 논리를 약화하며, 비핵화 협상의 조건을 준비해 나가는 외교, 국방, 통일의 통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재성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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