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의시대정신] 열린 사회의 닫힌 생태계, 애플

2024. 4. 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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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개발보다 주가 부양에 몰두
혁신의 아이콘서 공룡기업 전락
건전한 시장 경쟁질서 훼손 혐의
결국 ‘반독점법’ 칼날 못 피해가

애플 주가가 영 시원치 않다. 나스닥이 상승 랠리를 이어가는 와중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전 세계 시가총액 1위의 왕좌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빼앗겼다. 2위 자리도 엔비디아에게 위협받고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애플 제국이 어쩌다 이런 굴욕에 처하게 된 걸까?

애플은 우리 시대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말이다. 직역하면 “배고픔을 유지하라, 어리석음을 유지하라”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끝없이 질문하며 나아가라”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애플은 배고프지도 겸손하지도 않다. ‘혁신 기업’ 대신 ‘공룡 기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다른 테크 기업들이 연구개발비를 쏟아부으며 인공지능(AI) 혁명을 일으키는 동안 주가 부양을 위한 자사주 매입에 몰두했다. 얼어붙은 지구 위에서 제 몸집을 이기지 못하고 멸종한 공룡처럼, 글로벌 규제 한파에 뒤뚱거리고 있는 거대 공룡 기업의 모습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3월 초 유럽연합(EU)은 애플에 약 2조70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21일에는 미 법무부가, 26일에는 미국 아이폰 소유자들이 애플을 고소했다. 모두 반독점법 위반 혐의다. ‘애플 생태계’란 이름으로 차별과 배타의 벽을 쌓아온 것이 문제가 됐다. 쟁점 중 하나가 ‘아이메시지’다. 아이폰 사용자끼리는 푸른색 말풍선으로 대화하지만, 다른 기기 사용자가 끼어들면 초록색으로 뜬다. 학생들 사이에 따돌림을 조장하고 아이폰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앱스토어 독점도 문제다.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며 혁신적인 앱들을 검열하고 차단했다. 또 애플 기기끼리는 물 흐르듯 호환되도록 한 반면, 타사 서비스와의 연동은 의도적으로 막아 사용자를 꽁꽁 묶어두는 전략을 고집했다. 애플의 자랑이자 성장동력이었던 ‘닫힌 생태계’가 결국 자유시장 질서를 위협하는 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전 세계가 무한 경쟁하고 있는 기술 패권 시대에 미국 정부는 왜 자국 기업의 발목을 붙잡는 걸까?

150년 전쯤으로 돌아가보자.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에는 대자본가의 시대가 열렸다. 철강왕 카네기, 금융왕 J P 모건, 석유왕 록펠러 등이 산업을 장악했다. 이때 상원의원 존 셔먼이 나섰다. “우리가 왕에게 복종하지 않듯, 상업의 전제 군주에게도 복종해선 안 된다.” 1890년 제정된 셔먼법, 반독점법의 시작이다. 이 법은 이후 공룡 기업들의 저승사자가 된다. 무자비한 인수합병을 일삼던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1911년 34개 회사로 강제 분할됐다. 이후 담배 회사 아메리칸 토바코, 방송사 NBC, 통신 회사 AT&T 등도 분할 명령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반독점법의 칼날 앞에 거대 정보기술(IT) 기업들도 휘청였다. 주목해야 할 건 그 결과 혁신 기업의 탄생이 줄줄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미 법무부가 1969년부터 IBM을 상대로 벌인 소송전의 결과, IBM의 외주업체 마이크로소프트(MS)가 성장했다. 90년대 PC 시장의 절대 강자는 MS였다. 윈도에 익스플로러를 끼워팔며 시장을 지배했다. 다시 반독점법이 제동을 걸게 된다. 분할 위기에까지 몰린 MS가 주춤한 사이 도약한 기업이 구글과 애플이다. 반독점법의 수혜로 큰 구글과 애플이 현재는 반독점법 위반으로 피소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아무리 강력하고, 아무리 앞서있고,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어떤 회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 이번 소송을 준비한 미 법무부의 성명이다.

한동안 고전하던 MS가 현재 애플을 누르고 다시 시총 1위에 올라선 건 의미심장하다. 반독점 소송 이후 컴퓨터 운영 체제에서의 우위를 잃은 MS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만 했다. 그 결과 클라우드와 AI 혁신의 선두에 서 있다. 반독점 행위에 대한 과감한 제재야말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혁신하는 미국의 저력인 것이다. ‘경쟁이 선(善)’이라는 그 확고함이 무섭고 또 부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미국 반독점법의 기초를 세운 건 정치인 셔먼이었지만 무뎠던 법의 칼날을 벼린 건 단 한 명의 기자였다. 아이다 타벨이다. 록펠러의 횡포를 19편에 걸쳐 조목조목 파헤친 그녀의 탐사보도는 국민의 분노와 법의 결단을 끌어냈고, 끝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이후 록펠러는 자선 사업에 매진하며 자본가의 사회 기여라는 전통을 만든다. 언론의 비판과 여론의 감시가 없었다면 무소불위 자본권력의 질주가 스스로 멈출 수 있었을까? 타벨의 보도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미국 저널리즘 100선 중 5위에 올랐다.

20세기 초 전체주의 폭력의 시대를 지나온 철학자 칼 포퍼는 인류의 역사를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의 투쟁으로 봤다. 그가 말하는 ‘열린 사회의 적’은 오만과 독선으로 개인의 자유와 판단을 억압하는 세력이며, 그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이다. 오늘날 포퍼의 철학이 아우르는 범위는 정치 체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 산업, 이념, 문화 등의 이름으로 언제든 열린 사회의 적으로 자라날 괴물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록펠러든 애플이든, 비대해진 거대자본이 자유시장경제의 심장인 ‘경쟁’마저 먹어 치우며 괴물이 되어갈 때, 깨어있는 법과 언론과 여론의 견제가 꼭 필요한 이유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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