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대응 정책은 너무 빡빡하다"…EU 은행들 분노한 이유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는 에너지 분야 소식을 국가안보적 측면과 기후위기 관점에서 다룹니다.
유럽의 민간 은행들이 당국을 향해 "기후위기 대응에 앞서나가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유럽 은행들은 "이대로 가다간 이미 우리보다 덩치가 훨씬 커진 미국 월가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고 호소했다.
7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유럽의 시중은행들로 구성된 유럽은행연합은 유럽중앙은행(ECB)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정을 계속 강화하면 유럽 은행과 미국 은행 간 경쟁력 격차가 더욱 벌어질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ECB는 기후위기 등 은행들의 ESG 관련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보고 기준을 만들고 있다. 기후위기를 재무적 요소로 반영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ECB는 2022년 역내 은행들을 대상으로 기후 스트레스 테스트를 진행해 60% 가량이 기후위기 관리에 미흡하다고 발표했다. 이후 작년 10월 유럽은행감독청은 ECB에 "기후위기는 금융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신규 리스크로서 관리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은행들이 탄소배출량 규제, 원자재 비용 급등 등 기후위기로 인한 고객사의 채무불이행에 대비하려면 대손충당금으로 해당 손실을 미리 회계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6월 ECB가 실시한 연구에서는 유럽 은행의 기업 대출금액 중 4분의 3가량이 환경 관련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규정이 정식 도입되면 유럽 은행들은 ESG 요소를 위험조정자본에 반영하고, 더 많은 사항들을 공시해야 한다. ECB는 향후 ESG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은행들에 벌금을 부과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경고했다.
ECB 관계자는 최근 한 컨퍼런스에서 "역내 은행들이 새로운 위험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며 "이를 통해 은행들이 다가올 ESG 리스크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유럽 은행들은 오는 18일까지 유럽은행감독청에 ESG 관련 리스크 규제안에 관한 피드백을 제출한다.
유럽 은행들은 미국 은행과의 역차별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유럽은행연맹의 지속가능금융 수석 정책 고문인 데니사 에버마에테는 "ECB의 조치가 유럽에만 적용되는 도구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이어 "은행들이 명확한 지침을 받기도 전에 계량화하기 어려운 신종 위험에 대비해 재정적 준비금을 따로 적립할 경우 추후 '이중 계상'의 가능성이 대두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런던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수석 은행 애널리스트인 필립 리차드는 "유럽 은행들의 주가는 미국 은행들의 주가에 비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 격차를 따라잡으려면 일부 규제 리스크가 해소돼야 한다"고 했다. 미국 JP모간과 모건스탠리의 시가총액은 장부상 자산 가치의 각각 1.9배, 1.7배에 달한다. 반면 유럽의 BNP파리바와 도이체방크는 각각 0.7배, 0.5배에 불과하다. 유럽 은행들은 ECB의 기후위기 관련 규제가 "월권 행위"라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최근 들어 공화당이 주도하는 ESG 반발 여론으로 인해 기후위기에 관한 각종 규칙이 백지화되거나 축소되고 있다. 지난달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원안보다 대폭 후퇴한 기후위기 관련 공시 규칙을 의결한 게 대표적이다. 최근 블룸버그는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후위기가 바젤은행감독위원회에서 전 세계적인 은행 규제안에서 제한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중앙은행은 기후위기 정책 입안자가 아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유럽 은행들 중에서는 선제적으로 대손충당금을 보고하기 시작한 곳도 있다. 라보뱅크, ING 등 네덜란드 은행들이 적극적인 편이다. 지난달 라보뱅크는 작년에 1360만유로의 ESG 충당금을 책정했다고 밝혔다. 라보뱅크는 블룸버그에 “이 자금은 미래의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잠재적인 만성 기후 사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ING도 ESG 리스크를 대손충당금에 넣고 있다고 전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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