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기자 2024. 4. 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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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이런 것

콩나물시루 지나는 물줄기 ― 붙잡으려는 ―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

물줄기 지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 ― 콩나물의 시간

닿을 길 없는 어여쁜 정념

다시 가령 이런 것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물 주는 손의 마음까진 알 수 없는 의기소침

그래도 다시 물 지나갈 때 기다리며 ― 쌔근쌔근한 콩나물 하나씩에 든 여린 그리움

낭창하게 가늘은 목선의 짠함

짠해서 자꾸 놓치는 그래도 놓을 수 없는

물줄기 지나간다

다음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생의 전부이듯 뿌리를 쭉 편다

아 ― 너를 붙잡고 싶어 요동치는

여리디여린 콩나물 몸속의 역동

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

김선우(1970~)

콩나물에게는 “콩나물의 시간”이 있다. 시루 안에 빼곡하게 서서 물줄기를 기다리는 콩나물들의 싱싱한 생명력은 비좁은 집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 버스 안에 빽빽하게 선 채로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새벽 저잣거리나 공판장에 모인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던 달동네의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과 골목길들, 그 모든 세계가 콩나물시루 안에 있다.

시루는 생명이 자라는 성스러운 곳. 콩나물에게는 작은 시루가 하나의 커다란 세계, 우주이자 생의 전부일 것이다. 시루 밖,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미는 콩나물들의 기척이 들린다. 물줄기를 “붙잡으려는” 하얀 발뒤꿈치 같은 뿌리들을 따라가면 “어여쁜 정념”이 당신을 기다린다. 내일의 당신을 살려줄 이 “폭풍 한 봉지!”, 이 싱싱한 마음 한 봉지! 이 고요한 혁명 한 봉지!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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