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볼드모트 정치'와 응징투표
한미, 증오·혐오로 뒤덮인 비호감 선거
“나베” “쓰레기” “학살” 등 역대급 독설
정책 실종되고 극단적 진영 대결만
‘악당정치’ 막는 적극적 한표 행사해야
미국 정치 컨설팅 기업 유라시아그룹은 올해를 정치적으로 ‘볼드모트(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최고 악당)의 해’라고 정의하고 세 개의 전쟁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더해 ‘미국과 싸우는 미국(the US vs. itself)’이 제시됐다. 11월 미국 대선이 정치적 분열을 심화하고 세계 안보와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두 개의 전쟁보다 ‘미국과 싸우는 미국’이 더 위험하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전·현직 대통령의 리턴매치가 확정된 미국은 전쟁 같은 선거판으로 치닫고 있다. ‘용광로 정치’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상대방을 향한 증오와 혐오로 가득 차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멕시코 국경 정책을 겨냥해 “피바다(blood bath)”라 비난했으며 “극단적 좌파 미치광이” “사이코” 등 막말을 퍼부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범죄자” “음모 이론가” “쪽박 트럼프” 등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22대 총선을 앞둔 우리 정치판도 저질 막말과 거친 독설에 포획돼 ‘대한민국과 싸우는 대한민국’으로 치닫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야당을 겨냥해 “정치를 ×같이 하는 사람이 문제” “쓰레기 같은 극단주의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회칼 발언’을 빌어 “몽둥이로 뒤통수 때려 대가리 깨진”이라고 했고 여당을 “4·3학살의 후예”라고 저격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후보를 향해 ‘나베(일본어로 ‘냄비’)’라고 불러 여성 비하 논란에도 휩싸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사전투표소 내 대파 반입 금지를 놓고도 유치한 설전과 막말이 오갔다. 한 위원장은 이 대표를 향해 “(투표소에) 일제 샴푸, 위조된 표창장, 법인카드, 여배우 사진을 들고 가도 되겠냐”고 했고 이 대표는 대파로 만든 헬멧을 손에 들고 “나라가 입을 틀어막는 ‘입틀막’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파를 틀어막고 있다”며 맞불을 놓았다.
여당과 제1야당을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의 언어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막말 대잔치’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은 정치인의 언어에서 그들의 철학을 읽고 나라를 위해 봉사할 정치인인지 판단한다. 대화와 타협이 아닌 갈등과 혐오만 조장하는 정치인의 언어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국민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인사들이 대거 공천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대생 미군 성상납’ 주장으로 물의를 일으킨 김준혁 민주당 후보는 과거 “미친 나라” “연산군 스와핑” 등을 발언한 사실까지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2012년 당시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의 ‘강간 막말’, 2020년 당시 차명진 미래통합당 후보의 ‘세월호 막말’ 등 불쾌했던 기억을 소환한다. 양문석 민주당 후보는 소상공인 사업 자금을 위법하게 대출한 뒤 강남 아파트를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과거 ‘흑석 김의겸 선생’의 신공이 ‘잠원 양문석 선생’으로 이어졌다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문재인 정부 당시 집값 폭등과 정권 핵심 인사들의 투기 의혹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았던 민주당이 이런 인사를 후보로 낸 것도 모자라 거센 논란에도 밀어붙이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4·10 총선이 임박하면서 여야는 상대당을 심판해달라며 응징 투표를 호소하고 있다. 한 위원장은 “국민의 한 표, 범죄자 응징의 창”이라고 외쳤고 이 대표는 “자격 없는 머슴, 주인 배반한 종을 응징하자”고 했다. 심지어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전국 유세 일정을 ‘윤 정부 응징 투어’로 이름 붙였다. 저마다 ‘응징 투표’를 외치지만 전쟁 같은 선거판에 실망한 표심이 기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탈리아의 정치 이론가 귀도 루지에로는 민주주의의 사악함은 다수의 승리가 아니라 ‘저질적인 것의 승리’라고 했다. 루지에로의 말을 빌려 ‘저질적인 것의 승리’로 함량 미달 후보들이 대거 선출되면 국회는 ‘볼드모트의 왕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기권이 아닌 ‘응징 투표’에 나서야 한다. 다행히 사전투표율은 31.28%로 역대 총선 중 가장 높다. 이틀 뒤에는 본투표다. ‘악당 정치’에 점령 당할지, 아니면 ‘악당 정치’가 발을 못 붙이게 할지 오롯이 유권자 당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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