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시민”을 적이라 부르는 정치 [세상읽기]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최악의 선거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런 선거가 있었나 싶다. 대내외 위기가 발생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경제성장률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고, 물가는 치솟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자영업자를 직접 지원하는 대신 대출을 알선해주며 위기를 모면하게 했던 정책이 ‘빚 폭탄’이 되어 자영업자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출생률은 역대 최저를 기록했지만, 이게 바닥이 아닌 듯하다. ‘런종섭’ 사태에서 보듯 공정은 물론이고 외교도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지지하는 정당을 가리지 않고 온통 못 살겠다는 아우성만 들릴 뿐이다.
이상한 일은 “동료 시민”이 이렇게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는데, 국회의원 선거는 점점 더 ‘민생 없는 선거’가 되어가고 있다. 주요 정당들이 이전과 같이 민생 공약을 내놓고 있지만, 진지한 논쟁은커녕 상대 공약에 대한 간단한 언급조차 듣기 힘든 지경이다.
민생을 둘러싼 정책 경쟁을 대신한 것은 경쟁 상대를 향한 막말이다. 집권 여당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야당 후보들과 대표들을 향해 “정치를 개같이 하는” “쓰레기” “범죄자 집단”이라고 몰아붙이며, 정치 무대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야당을 지지하는 수많은 국민은 영문도 모른 채 “정치를 개같이 하는” “쓰레기” “범죄자 집단”을 지지하는 분별없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단순히 한 위원장이 ‘막말’을 했다는 데 있지 않다. 막말이라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넘쳐나는 게 정치판의 현실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 막말을 사인이 아닌 집권 여당의 대표가 민주적으로 경쟁해야 할 야당의 후보와 대표에게 했다는 데 있다. 여당의 대표가 민주적으로 경쟁해야 할 야당 후보와 대표를 쓸어버려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에서 민주주의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위원장이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정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말들이다.
상대를 제거해야 할 범죄자 집단이자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에서 위태로운 것은 민주주의만이 아니다. 민주적 경쟁을 부정하고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실직, 폐업, 질병, 빈곤, 불평등, 돌봄 등 민생은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없다. 선거가 적을 죽여야 하는 전쟁이 되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고, 민생은 그다음, 그다음이 된다.
이번 선거가 민주화 이후 최악의 선거인 이유이다. 물론 여야가 죽기 살기로 상대를 비난했던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한국 정치는 늘 그래왔다. 하지만 적어도 2022년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까지 지난 10여년 동안 민생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중요 의제 중 하나였다. 경쟁 상대를 무능하고 부도덕한 집단이라고 비난하기는 했지만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경쟁하는 정당들은 급조했지만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생 공약을 제시하는 노력도 병행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공적 복지의 확대는 ‘선거동원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공적 복지의 확대가 주요 선거를 둘러싸고 여야가 경쟁적으로 민생 공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소수 정당이었지만 진보정당(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은 이런 공약 경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 공약을 경쟁적으로 제시했었다. 마치 포커를 치는 것처럼 한 후보 먼저 민생 공약을 발표하면, 다른 후보는 ‘하나 받고 하나 더 얹어’ 민생 공약을 발표했다. 2017년 대선도 유사했다. 2016~2017년 촛불 항쟁 이후에 치러졌던 선거라는 특성이 있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민생 공약을 내놓았다. 모든 후보가 ‘최저임금 1만원’에 동의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2022년 대선을 지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민생 대신 공정이 중요한 정치 의제로 부상하면서, 상대가 경쟁자가 아닌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 야당은 협치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반국가, 반헌법 세력”, 적이 되었다. 정치가 “동료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자 민주주의는 물론 민생과 그 민생을 촉진했던 진보정당도 위태로워진 것이다. “동료 시민”을 적이라 부르는 정치의 끝은 무엇일까? 선거 이후가 암담해 보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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