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들의 선거운동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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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버너, 배와 무릎.
장애인 부모들은 4일, 서진학교 사태 이후 7년 만에 무릎을 꿇었다.
후보들만큼 가난한 이들도 더할 나위 없이 열띤 선거철을 보냈다.
가스버너의 처참함으로부터, 배와 무릎을 땅에 붙이며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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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호 | 이슈팀장
가스버너, 배와 무릎. 투표를 앞두고 일기장 비슷한 공책에 적었다.
눈부신 벚꽃 사이 펼침막에 새겨진 강렬한 문구들, 뱃전을 때리는 음압의 유세 차량, 그 유명한 정치인들의 ‘초근접 인사’를 매 출근길 접하면서도 좀처럼 달뜨지 않았던 22대 총선을 이들 단어로 재구성해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질없어 보였다. 우리 동네,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 맞붙는 격전지라는데 후보 누구도 이 단어들을 말해준 적은 없다.
#가스버너. 총선을 20여일 앞둔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중구 후암동 쪽방 건물 3층에서 불이 나 주민 1명이 숨지고, 1명이 얼굴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직접적인 화재 원인은 ‘가스버너’였다. 주방이 없고, 비좁은 쪽방에서 가스버너는 긴요하고 불가피하며, 위험한 물건이다. 주민 15명이 잠시 대피했으나 대부분 같은 건물, 다만 직접 불길이 닿지는 않은 4층과 5층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돌아간 집은 여전히 생명을 위협하는 비적정 주거였다.
수익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적정 주거와 정착을 함께 고려한 도시 개발 정책은 과거 몇차례 시도(영등포·대전 등)됐다가 그쳤다. 서울역 쪽방촌의 경우 2021년 2월 ‘서울역 쪽방촌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주택 및 도시 재생사업 추진 계획’이 발표되고 3년째 진척이 없다. 쪽방 주민들은 다시 한번 안전한 주거권 보장, 강제력 있는 주거 안전 기준의 입법을 이야기했다.
#배와 무릎. 총선을 열흘 앞둔 1일부터 장애인들은 매일 아침 지하철 바닥에 ‘배’를 붙인 채 기어가면서 시민에게 투표 참여를 호소했다. 5일에는 사전투표소를 같은 자세로 향하다가 경찰 방패에 가로막혔다. 방패 사이로 얼굴만 내민 채 “장애인 권리에 투표해달라”고 했다. 장애인 이동권의 보장, 권리 중심 공공 일자리 등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움직이고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양팔과 두 다리, 머리를 땅에 붙이는 ‘오체투지’ 자세를 취할 수 없는 이들은 배까지 바닥에 붙여 엎드린 채 느릿느릿 움직였다. 총선 공약에서 ‘황금열쇠’처럼 소환되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와 대척을 이루는 속도였다.
장애인 부모들은 4일, 서진학교 사태 이후 7년 만에 무릎을 꿇었다. 지체장애인을 위한 22학급 규모 특수학교가 들어설 성동공고 용지에 특수 목적 고등학교를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낸 후보와 정당에, 이를 철회해달라고 호소했다. “학교에 갈 수 있게 해달라”며 울었다. 명문·명품 교육이 아니라, 그냥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달란 얘기였다.
#빈곤. 총선을 닷새 앞둔 지난 5일 장애인, 빈민, 철거민들이 국회 앞에 모여 기자회견을 열었다. “빈곤과 불평등 해결을 위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라”고 했다. 빈곤은 수만 가지로 규정할 수 있고 또 어느 규정도 완전하진 않다. 그래도 선거철을 앞두고 짚어볼 만한 정의로 ‘물질적인 자원이 부족해 기본적인 사회 참여, 시민권 행사가 곤란한 상태’가 있다. 쪽방촌 주민은 자원이 부족해 시민권의 기초인 안전한 거주(사회 참여)가 곤란하다. 장애인이 이동하고, 일하고, 교육받으며 한국의 여느 시민처럼 살려면(사회 참여), 터무니없는 비용(자원)이 든다. 참석자들은 2024년 한국에서 기본적인 사회 참여는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 시장이나 현재 제도가 보충하지 못하는 자원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집요하게 묻고 있었다. 크든 작든 빈곤의 가능성을 품은 모든 유권자를 위한 얘기였다.
그랬다. 후보들만큼 가난한 이들도 더할 나위 없이 열띤 선거철을 보냈다. 관련 정책과 입법을 약속해준 후보와 협약식을 맺고, 정당·후보별 공약도 꼼꼼히 평가해 공개했다. 용납할 수 없는 후보의 목록도 추렸다. 가스버너의 처참함으로부터, 배와 무릎을 땅에 붙이며 호소했다. 역을 신설하고, 국제학교를 유치하고, 소수자를 위한 시설은 치워내겠다는 약속들이 못 준 선거철의 뭉클함이 그래도 거기 있었다.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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