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에 반항한다는 것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재작년 어느 겨울밤,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병원에 가보니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반깁스를 해야 했고 좋아하는 술도 못 마시게 되었고 연말 일정에도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짜증이 나는 것은 둘째치고 통증이 꽤 심했고, 나의 찬란한 일상이 엄청 성가시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합주 끝나고 간단하게 맥주 한잔 정도 마셨을 뿐인데 추운 날씨 때문이었을까? 나는 마음에 평정을 찾고 명상하듯 내면과 마주하며 내가 넘어진 이유를 찾아보았다. 머릿속 안개가 걷히며 해답을 알아냈다. 그것은 바로 ‘중력’ 때문이었다.
중력만 아니었다면 나는 맨바닥에 떼굴떼굴 구르며 발목을 접질릴 이유가 없었다. 문제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중력을 만나서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비만 오면 온몸이 쑤시고, 허구한 날 어깨 뭉치고, 피티(PT) 받을 때 바벨이 무겁게 느껴진 것도 다 중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가 오길 기다렸다가 땅이 연해진 찬스를 놓치지 않고 미친 듯이 삽질을 해서 지구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중력과 한판 붙기로 했다.”
여기까지 감동의 눈물이 줄줄 흘러 올라가는 이야기가 다리에 반깁스를 하고 집에서 심심해서 써본 단편 소설의 도입부이다.
‘중력’
내게 ‘중력’이란 소재는 언제나 창작의 큰 줄기를 담당하고 있다. 무엇인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당연한 사실에 한 번쯤 의문을 가지고 반항하는 것은 명왕성에서 따온 레몬즙 같은 신선함을 주며 새로운 관점으로 다가설 수 있게 한다. ‘나는 중력에 반항한다.’라는 문장은 나의 창작의 시발점이자, 굳어가는 편견을 깨는 망치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오 마이 캡틴” 키팅 선생님이 책상에 올라가서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하라고 한 것도 일종의 중력에 반항하는 몸짓이다. 등산이나 번지점프도 그렇고, 놀이동산의 놀이 기구 중 가장 스릴 있고 재미있는 것은 다 중력에 반항하며 노는 것들이다.
얼마 전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을 보았다. 시작부터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을 배경음악으로, 스턴트맨의 추락 사고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슬로우모션으로 긴박하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촬영 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를 못 쓸 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의 스턴트맨과 오렌지를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서 병원에 입원한 어린 소녀와의 우정을 그린 영화이다. 추락의 아픔과 내면의 상처들을 환상적이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액션 동화처럼 풀어내며 위로해 준다.
누구나 살면서 아주 가끔 크고 작은 추락을 경험한다. 작은 실패들, 가벼운 추락은 우리에게 넘어지는 법을 알려준다. 이렇게 배운 낙법으로 우리는 삶의 지혜를 계단처럼 쌓아 더 높은 곳으로 도전하며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카로스처럼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다 추락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그 충격은 더 클 것이다. 많은 분들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기적 같은 삶을 이뤄내지만 그런 상황이 내게 닥쳐온다면 과연 나도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을까?
영화에서 절망에 빠진 스턴트맨은 입원 생활이 무료하게 느껴져서 심심해하는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실과 판타지가 섞인 액션 모험 스토리가 재미나게 이어진다. 이에 몰입된 아이는 자신도 이야기에 끼어들게 된다. 하지만 다리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스턴트맨은 절망하면서 이야기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아이는 실망하고 울면서 왜 사람들이 다 죽어가냐고 묻는다. 스턴트맨이 “이건 나의 이야기니까”라고 말하자, 아이는 “이건 내 이야기도 돼요”라고 답한다. 그렇게 순수한 아이의 진심이 담긴 한 마디 위로에 스턴트맨은 다시 희망의 길을 선택한다.
어찌 보면 우리는 각자 죽음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시간이라는 용수철에 매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큼 죽음에 가까워져야 가속도를 느낄지 우리는 그때가 되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다. 삶은 길고 느린 추락일 수도 있다.
떨어지는 꽃잎이 아름다운 것은 중력에 반항하여 예술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슬픔을 슬픔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나의 고정관념들, 나와 다른 의견들에 대해 중력을 비틀 듯 바라볼 수 있어야 우리는 서로 마찰을 줄이며 풍요롭게 살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중력을 이겨낼 수 없다. 우리의 삶에는 언젠간 끝이 오고야 만다. 그렇다고 무조건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는 운명에 반항하듯 중력에 반항하고 나아가 중력을 활용하여 꽃잎처럼 아름답게 삶을 살아가야 한다. 봄날,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며 오늘도 중력에 반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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