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은 아직도 모른다 [아침햇발]
최혜정|논설위원
지난 1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행간엔 억울함이 읽힌다. 27년 동안 건드리지 못한 “국민의 90%가 찬성하는 의사 증원과 의료개혁”을 해보겠다는데 “기득권 카르텔”인 의사들에게 가로막혔다. 정부 출범 이후 “37차례에 걸쳐 의사 증원을 협의”했고, 지난해 1월부턴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해 “무려 19차례나 의사 증원 방안을 논의”했는데도 의료계는 논의가 부족했다며 “사실을 왜곡”한다. 그러더니 “이제 와 근거도 없이 350명, 500명, 1천명 등 중구난방으로 숫자를 던지고” 있다. 그동안 화물연대 파업, 건설노조와의 갈등, 건전재정 기조, 한-일 관계 ‘정상화’ 등의 난제 해결을 “과감히 실천”했는데 왜 이번엔 같은 방식으로 밀어붙여도 해결되지 않는지 당혹감도 엿보인다. 대화 여지를 열어놓겠다는 메시지는 윤 대통령의 강한 어조에 묻혀 대통령실 참모들이 부랴부랴 ‘대통령 번역기’ 역할에 나선 뒤에야 공식화됐다.
윤 대통령이 두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의-정 갈등을 다루는 모습은 그간 반복돼온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 발생→버티기(또는 적반하장)→여론 악화→뒷북 수습으로 이어지는 패턴이다. 의-정 갈등은 증원 규모가 예상을 뛰어넘는 2천명으로 확정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의사들의 반발이 확산되자 ‘그간 하던 대로’ 압수수색과 면허정지 등 강경책으로 맞받았다. 협의는커녕 지난달엔 아예 학교별 배정 인원까지 발표하며 쐐기를 박았다. 갈등 장기화로 정부의 조정 능력이 의심받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국민 앞에 섰다. 앞서 채 상병 순직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 이종섭 주오스트레일리아(호주) 대사 임명, 황상무 수석의 ‘회칼 테러’ 발언,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 등을 대처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때마다 여권에선 ‘만시지탄’이라는 한탄이 터져나온다. 기자들을 막아선 채 51분 동안 물을 두번 마시며 읽어 내린 대국민 담화는 ‘내가 뭘 잘못했냐’는 억울함을 드러내며 ‘불통 대통령’을 거듭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주춤하는 듯했던 정권 심판론을 순식간에 선거 전면에 끌어올린 이도 윤 대통령 자신이다.
돌아보면 윤 대통령의 지난 2년은 ‘총선 승리’를 향해 달려온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여소야대 국회가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모든 역량을 22대 총선 준비에 집중해왔다. 올해 들어 관권선거 비판을 무릅쓰고 24차례에 걸쳐 전국을 누빈 민생토론회는 이 프로젝트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준석 대표를 축출하고 전당대회에서 나경원·안철수 후보 등을 우악스럽게 내치며 김기현 대표를 앉힌 것도, 지난 연말 ‘복심’인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밀어넣은 것도 모두 “이번 총선은 대통령실에서 주관해야 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원하는 사람이 (대표가) 돼야 한다”(여권 관계자)는 논리였다. 지난해 내내 보수 지지층 결집을 위해 비판세력과 전임 정부를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로 매도하며, 철 지난 이념전쟁을 주도한 이도 윤 대통령이다. 입법부를 무시한 잇따른 거부권 행사 역시 ‘국정 발목을 잡는’ 야당과 싸우면서 30%대의 고정 지지층을 모아내겠다는 전략적 행보로 해석됐다.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번 총선에 대한 기대는 여당이 탄핵 저지선인 100석을 지킬 것인지 여부로 쪼그라들었다. 믿었던 한동훈 위원장마저 “(정부 실패의) 책임이 저한테 있진 않지 않나”라고 속내를 드러내는 ‘천기누설’을 했다. 보훈부 장관을 지낸 박민식 후보(서울 강서을)는 홍범도 흉상 이전에 “나는 반대했다”며 손절했다. 적지 않은 여당 후보들이 선거 공보물에서 윤 대통령을 지운 채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인기 없는 대통령이 총선 지휘를 한다는 게 얼마나 헛된 망상이었는지 지금쯤은 깨닫고 있을까.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국민이 옳다”며 몸을 낮추고, 민생과 소통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껏 반성한 적도, 책임진 적도 없는 일방적 국정운영 기조는 변하지 않았고, ‘875원 대파’ 소동이 드러낸 민생 무능까지 겹쳐 거센 심판론의 파고 앞에 스스로 섰다. 대국민 담화에서 확인됐듯이 윤 대통령은 그저 억울할 뿐 국민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선거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윤 대통령이다. 민심의 심판대 위에서 윤 대통령이 ‘국민의 힘’을 확인할 시간이다.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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