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에 그대' 한동훈, '정권 심판론'에 스스로 불 붙인 與黨
"동료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줄 사람과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2023년 12월26일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속의 그대> 가사 중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를 차용했다는 연설이다. 한동훈은 말 그대로 '환상 속의 그대'였다. 그렇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처음부터 한동훈은 '정권 심판론'을 강화하는 기제였다. 그는 대한민국 법조 엘리티즘의 정점에 있었고, 윤석열로 상징되는 검찰 정치의 선두주자이면서 자타공인 정권의 2인자였다. 지금 그는 정치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게 아니고, 서초동 사투리를 여의도에 이식하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입장에선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여의도 데뷔 100일, '정치인 한동훈'에 대한 숱한 논평의 잡음을 헤치고 나면, 남는 것은 그가 윤석열 대통령이 만든 '선거판'의 장기말이라는 초라한 현실이다.
정권 심판론이 이렇게 강할 줄 몰랐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공감하기 어렵다. 정권 심판론은 예견돼 있었는데다, 한번도 수그러든 적이 없었을뿐더러, 이미 많은 이들이 그걸 인지하고 있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지난해 11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부터다. 17%포인트 이상 차이로 서울에서 대패한 여권 내부에선 '정권 심판론'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언론 특유의 '냄비 근성'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여권의 '총선 위기론'은 꽤나 심각하게 다뤄졌다. 그 경각심을 일거에 해소해 버린 게(해소된 것 처럼 보이게 만든 게) 한동훈의 등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동훈은 정권 심판론을 희석하고 객관적 상황 인식을 헝클어버린 일종의 '교란 바이어스'로 작동했다.
마케팅에서 자주 사용되는 '휴리스틱'(Heuristics)이란 말이 있다. 사전적 뜻풀이는 "시간이나 정보가 불충분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거나 굳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신속하게 사용하는 어림짐작"이라고 돼 있다. '발견법'이라고도 번역되기도 하는데, 온전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함을 무릅쓰고 '휴리스틱'이라 부르겠다. (바로 이런 방식이 '휴리스틱'이다.) 이를테면 우린 급하게 휴대폰을 바꿀 때 상품의 객관적 스펙보다 '삼성'이나 '애플'이란 브랜드나 '하이엔드(최신형)'같은 수식어를 선택한다. 이런 방식은 휴대폰 선택시 고려해야 할 '불확실성'과 '변수'들을 계산하느라 허비할 시간을 아껴주는 장점이 있지만, 그 휴대폰이 내 사용 목적이나 취향과 꼭 맞을 거란 장담은 할 수 없게 된다.
휴리스틱은 큰 노력 없이도 빠른 시간 안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답안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터무니없는 오류에 빠지거나 편향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쉽게 말해 총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합리적 판단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국민의힘은 11월 재보선 패배의 원인을 곱씹기도 전에 '73년생'이라는 세대적 참신함, 야당과 맞서 싸운 '스타 장관'이란 타이틀, '범죄자' 이재명에 맞설 '정의 검사'라는 이미지를 즉석에서 구매하기로 결정한다. 당내 '절대 권력자'인 대통령의 '점지'가 있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그 시점부터 진보, 보수 막론하고 언론과 호사가들은 한동훈이라는 '신상품'에 대한 인상 비평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어떤 교수는 '73년생'이란 상징성을 내세워 서태지, X세대 같은 현란한 키워드를 동원한 '팬북'인지 뭔지 모를 알쏭달쏭한 책을 내고 환상을 부추겼다. 휴리스틱을 노린 얄팍한 상술의 전형이다. "누릴 거 다 누리고 깨어있는 척"한다는 민주당 지지 X세대(70년대생, 90년대 학번)을 조롱하고 꾸짖는 논평들도 심심찮게 나왔다. 여기에 이재명을 위협하는 '대권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가 던져지면 국민의힘은 11월 재보선 참패의 기억을 덮고 마치 새로운 출발선에 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휴리스틱'을 걷어내고 객관적 상황을 보자. 국민의힘은 2년 동안 윤석열 대통령 주도하에 당 대표를 내쫓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두 번 가동했다.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로 김기현 체제가 무너지면서 두번째 당대표 축출이 이뤄졌고, 마침내 세번째 비대위가 들어서게 되는 상황. 집권 2년 동안 1년 이상이 '상시적 비상 상황'이었던 데다, 수도권 민심의 바로미터라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대패, 윤석열 정부 국정 운영에 대한 심판론이 비등하던 상황. 물가는 치솟고 경제 전망은 어두우며, '영부인 리스크'를 넘어 '대통령 리스크'가 부각되던 상황. 객관적으로 봤을 때 대통령의 '분신'과 같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검사 후배를 집권당의 원톱으로 세울만한 상황이라고 보여지기 어렵다.
게다가 '기대'와 달리 '신상품', 'X세대 보수'라는 '73년생 한동훈'은 정작 또래에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한동훈의 지지층은 '60년생 윤석열'과 겹친다. 메트릭스 여론조사( 3월 30∼31일 전국 성인유권자 1000명 대상, 100% 무선 전화 면접 방식, 응답률 12.4%, 오차범위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한동훈의 대선 주자 선호도는 31%(이재명 37%)인데, 연령대별로 20대, 30대, 40대, 50대에선 이재명에 밀리고 60대, 70대에선 이재명에 앞선다. '73년생 윤석열'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막연한 기대'는 환상을 수반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치 아프게 용산을 건드리고 당정 관계를 확립하고, 영부인 리스크를 제거할 노력을 하느니, 빠른 문제 해결을 위해 검증되지 않은 선거 초보, 정치 초보 한동훈을 '어림짐작'으로 선택한다. 한동훈 리더십에 대한 정보나 판단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메시아적' 확신은 곧 환상이 되고, 환상은 보통 환멸로 이어진다.
한동훈에겐 잘못이 없다. 그는 대통령이 선택한대로, 당이 선택한대로 가고 있을 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년간 한 것을 한동훈은 100일간 응축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검사 정치'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재단해 왔다. 노동조합, 야당, 교육계에 이어 과학기술계까지 '카르텔'로 뭉친 잠재적 범죄자로 다루더니, 최근에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의사들에게 "국민 생명을 인질로, 불법 집단행동을 벌이면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이듯, 검사들의 세계에선 모든 게 적 아니면 우리편이다. 공정과 정의를 독점한 검사들이 세운 이분법은 급기야 '야당'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정치 지형을 만들어냈다. 국민의힘을 제외하고 이번 총선에서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는 정당인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새로운미래, 진보당, 녹색정의당, 기본소득당 등 7개의 야당이 모두 '반 윤석열' 선명성을 앞다퉈 내세운다. 국민의힘만 몰랐을 뿐, 한동훈이라는 상품을 선택한 이상 이렇게 될 것을 많은 이들이 예상했다.
이재명이 재판을 받고 있고 조국이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다는 걸 모르는 유권자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검사'들이 주도하는 정당이 밀리는 듯한 모습은 왜일까. 한동훈은 "저는 조국 같은 사람이 정치하겠다고 나서서 이렇게 지지율을 받는 게 기괴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국이 기괴한 게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기괴하다'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상황을 불편해하는 태도다. 평생 남을 재단하는 직업을 가진 '강남 엘리트 도련님'의 한계다.
'역프레임'의 힘은 세다. 한동훈이 범죄자 응징을 말할 때, 김건희 명품백 사건과 해병대 채상병 사건에 대한 질문은 오히려 커져간다. 한동훈이 검사 조직에 속할 때는 "범죄자들을 응징하자"는 말이 당위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가 국민의힘에 속해 있을 땐, '누가 보면 국민의힘 후보들 중엔 범죄자가 한 명도 없는 줄 알겠다'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한다. 당장 대통령의 처가와 한동훈의 자녀가 범죄 의심을 받고 있으며, 대통령 본인도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범죄자를 사면해 후보로 만들었다 망신을 당한 게 6개월 전 '강서구청장 재보선'이었다. 자신이 징역 30년을 구형한 전직 대통령과 웃으며 사진을 찍고 나서 '범죄자 응징'을 말하는 것도 모순이다. 본인 표현대로 "진흙밭"에 들어온 '정치인 한동훈'은 아직도 스스로 '정의로운 조직'에 속한 '정의로운 검사'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휴리스틱을 걷어내고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계열을 확장해보자. 돌이켜보면 한동훈 급의 '엘리트 정치인'들은 여의도에 숱하게 등장해 왔다. 고시 몇 관왕에, 목포 천재, 제주 천재, 소년 급제, 의사 출신 벤처 사업가, 그리고 명문 가문의 금수저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본회의장에서 찬성, 또는 반대 버튼을 누르다 무수히 사라져 간 '엘리트 정치인'들. 그들과 한동훈이 다른 점이라면, '73년생' 같은 현혹적 상징성이 아니라, 정권 1인자에 의해 벼락 출세한 정권 2인자라는 것이다. 당 대표 직은 한동훈 스스로가 쟁취한 것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차피 선거는 내 얼굴로 치르는 것'이란 말을 종종 해 왔다고 한다. 지금 그대로 되고 있다. 한동훈은 애초에 '윤석열의 상징'으로 소모될 운명이었다. '손쉬운 선택'의 유혹에 넘어가 본질을 외면한 후과를 달게 받고 있는 건 국민의힘이다. 한동훈은 '불출마'를 선언할 게 아니라 애초에 용산 같은 지역구를 잡아 국회의원이 되고 의정활동을 통해 정치인으로서 차근차근 배워가는 과정을 밟았어야 했다. 만성 인물난에 시달려 온 허약한 보수는 이번에도 당의 주인을 '인력 외주업체(검찰)에 발주했다. 이 게으른 선택의 결과는 곧 드러날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는 용기를 주는 듯, 조롱하는 듯 모호한 가사 내용으로 유명하다. 그 가사 중엔 이런 구절도 있다.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그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꼭 잘될 거라고 큰소리로 말을 하고 있다/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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