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의 "나중에" 정치는 그만, '불순분자'의 민주주의를 꿈꾼다[젠더살롱]
“그 막다른 골목에서 뻗어 나오는”
에이드리언 리치, 촬영 대본 부분 (문턱 너머 저편, 문학과지성사, 2011)
헐어있는 문장들
주말이면 어린이 반려자와 함께 종종 국회에 간다. 국회도서관에서 절판된 책을 찾아 읽거나 국회 앞 잔디마당을 휘저으며 잠자리를 잡기도 한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국회를 나설 때면 어린이 반려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국회 정문에 바짝 붙어 자리한 농성천막들이다. "여기서 누가 살고 있는 거야?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라며 기웃거린다. 한글을 익히고 있는 어린이 반려자에게 천막을 뒤덮고 있는 현수막 속 굵은 글씨들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정성스레 읽어준다. 차.별.금.지.법.제.정.쟁.취.단.식.투.쟁.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전부가 걸려있는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이곳 천막들이 지키고자 하는 ‘문장’들은 하나같이 “막다른 골목에서 뻗어 나오는” 어떤 결기들이 가득하다. 국회로 오랫동안 들어가지 못한 문장을 건 천막일수록 비바람에 온통 헐어있다. 농성천막은 민주주의의 헐어있는 표정이다.
헐어가는 문장을 사수하기 위해 농성장에서 잠들었던 여러 밤이 내게도 있었다. 농성장 근처 지하철 화장실에서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양말 신은 채 누워 간신히 잠들었다가 찢어질 것 같은 몸으로 일어나 덜 깬 목소리로 '권리를 보장하라'고 말하던 아침들이 있었다. 이곳으로 찾아와 비응답(nonresponse)으로 내몰린 목소리에 응답하고자 했던 사람들 중에는 유독 진보정당의 정치인들이 많았다.
나중에 정치
정치적 주권자로 대의 되지 않는 목소리를 부지런히 찾아가 듣고, 이 목소리들을 제 몫의 권리로서 보장할 수 있기 위해서 진보정당이 국회로 들어가 입법활동을 해야 하지만, 국회로 들어가는 길은 까마득하다. 20년 넘게 진보정당들에 당적을 두고 있는 나는 선거철이 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나중에’다. 찍어주고 싶은데 지금은 "저 나쁜 놈들을 먼저 심판해야 되니"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어차피 찍어도 안 될 거, 표 버리기 싫으니" 나중에. 승자독식 선거제도에서 진보정당을 향한 투표는 끊임없이 나중에로 ‘유예’된다. 이러한 ‘나중에’ 정치는 소수자들이 권리를 외칠 때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기도 하다. 성소수자 인권 보장도 나중에, 장애인권리예산도 나중에, 청소년 투표권도 나중에, 비동의 강간죄도 나중이다. '나중에'는 밀리고 밀려 '언젠가'의 미래로 유예되고 현재는 가차 없이 접혀진다. ‘언젠가’를 희망하는 일은 쉽게 허망해진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없이 진보정당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대기실 신세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신, 아버지, 목자의 민주주의
16세기 보댕, 17세기 홉스, 18세기 루소, 19세기 토크빌로 이어지는 남성-엘리트 근대정치사상가들의 공통된 대전제는 ‘대의제(representation)’였다. 지배계급에 유리하고, 엘리트 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창안된 ‘대의제’는 국가를 다스리는 “세속의 신”으로 표상되었다. 이러한 ‘대의제’가 민주주의로 불리게 된 것은 18세기 말 독립전쟁을 통해 유럽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 영토를 가지게 된 미국에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신’의 얼굴을 한 대의제에 ‘아버지’의 표정을 가진 민주주의를 결합시켜 대의제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민주주의를 대의제의 하나로 받아들인 것이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대의제를 탄생시킨 것이 애초에 아니었다. 세속의 ‘신’과 건국의 ‘아버지’들이 결탁하여 자격 있는 엘리트 계급의 성소인 의회에 무지한 양 떼들을 인도할 ‘목자’를 투표로 뽑아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자격 없고 비이성적이며 판단력 없는 다수 인민들을 대의하고, 대표하고, 대리하는 선거대의제를 통해 체제전환, 체제전복이 불가능한 근대적 대의제 민주주의 배치를 합리적으로 완성했다. 이 배치에서 여성의 몫, 흑인의 몫은 없었다. 자격 있는 국민주권의 이념을 실현하는 한 방식으로 배치된 대의제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majority rule)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소수성(mimority)은 다수성에 의해 ‘관리’받고, ‘보호’받고, ‘배려’받는 객체로 전락한다. 대의, 대표, 대리하는 자에게 통치하기 편한 이들은 목소리 없는 자들이다. 입이 틀어 막힌 자들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저항운동이 갖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왜소하게 만든다. 하지만 소수자들이 받아먹기만 하는 입이 아니라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에서 인민의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불순분자들의 민주주의
처형될 것을 예감하면서 써내려간 여성인권선언문(1791),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던 투표소에 ‘난입’하여 자행한 불법 투표(1872), 여성사회정치연합(1903)을 조직하여 "말이 아닌 행동으로"를 구호로 삼아 견고한 남성중심사회를 향해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고, 경마장으로 뛰어들고, 수도 없이 투옥되면서도 참정권을 위해 싸운 이들은 모두 마녀라 불리고, 미치광이라고 불리고, 비이성적인 여우로 불리고, 불순분자로 불리었다.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불-순응하는 불순분자들의 민주주의, 주권 표현에 참여할 수 없었던 몫 없는 자들(랑시에르)의 목소리가 미래의 민주주의를 이끌었다. 국민 안의 비국민, 시민 안의 비시민으로 표상되지도 않는 불순분자들의 투쟁 속에서 민주주의는 늘 새롭게 발명되었다. 통치 권력에 포섭되지 않고 자기 삶을 오롯이 꾸려나갈 수 있는 역량으로서의 직접민주주의, 세계를 함께 돌보며 살아갈 수 있는 역량으로서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말한다. ‘우리를 대신해서 말할 필요 없다. 우리의 일부로서 말하라.’
몫 없는 자들의 '몫소리'
우리를 대의·대표·대리·대신할 자격 있는 개인(individual·독립적이고 원자화된 주체)이 아니라 몫 없는 자들의 '몫소리'의 일부(multi-dividual·연립적이고 분자화된 공동체)로서 진보정당 정치인들이 있다. 자기현장을 가진 '몫소리'로 말하는 진보정당들의 비례대표 후보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노동당 비례후보 1번은 여성 건설노동자이고, 2번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가다. 녹색정의당 비례후보 1번은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을 세 차례 역임한 간호노동자이고, 2번은 진보정치의 불모지 경북에서 녹색정치운동을 하고 있는 청년정치인이다.
뭇 생명들을 대의하는 게 아니라, 여성 노동자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청년을 대리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뭇 생명의 일부, 여성 노동자의 일부, 청년의 일부, 장애인의 일부로 있다. 몫 없는 자들의 '몫소리'를 가진 공동체의 일부로서 말한다.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 (호피족 옛 속담)
존재의 기반을 뒤흔드는 파국적 기후위기, 양극으로 치닫는 불평등의 가속화, 정상성을 기준 삼아 소수자를 향한 혐오를 재생산하는 혐오정치... 위독한 미래를 마냥 두고만 볼 수가 없다. 뭇 생명의 심장을 나눠 가진 우리, 차별받는 인간의 심장 박동을 느끼는 우리, 불평등 속에 사라져가는 우리 '몫소리'의 일부로서 말하고자 하는 진보좌파정당을 지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의 일부’로 기꺼이 연결된, 뒤섞인, 엮여있는, 땋아진 '몫소리'들의 연립체인 불순분자·좌파분자·페미분자·녹색분자의 정당을 지지한다.
미래하라
페미니스트 정치인 녹색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2020년 비례대표 경선에서 내걸었던 슬로건은 “미래하라”였다. 기존의 국어적 문법으로는 비문에 불과한 “미래하라”에는 새롭게 배치될 미래의 문법이 깃들어있다. “미래는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장혜영) '언젠가' 도달할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미래를 '당장' 끌어당겨 오자. 민주주의를 진화론, 발전론으로 말하는 시계적 미래가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뒤엉킨 복수적 미래-들을 실행시켜 나가자. 우리가 세계에서 보기를 원하는 그 미래가 되자.
“거기서 미래에 대한 지도를 읽는다.”
에이드리언 리치, 촬영 대본 부분 (문턱 너머 저편, 문학과지성사, 2011)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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