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총선 열기 후끈한데…' 냉소와 무기력이 지배한 日 민주주의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 변화하지 않는 일본 정치
한국 시민 사회의 높은 정치 참여 의식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2017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 집회와 대통령 탄핵에 이르는 과정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 그뿐 아니라 그로 인해 실제로 한국 사회가 크나큰 변화를 맞이했으니 일본 시민 사회에는 매우 인상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긍정적인 시각만은 아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분노해 거리로 뛰쳐나갈 정도로 집권 세력의 부정부패와 거짓말이 심각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당시의 촛불 집회가 수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평가에는 모두 동의할 것 같다.
일본의 상황은 대조적이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서서 시위나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실제로 시민들의 참여에 의해 사회가 변화하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자민당은 1955년에 결성된 이래, 2009~2012년의 3년 남짓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권력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당이 70년 가깝게 장기 집권을 할 정도로 시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이 당이 너무 오래 집권한 나머지 ‘고인 물’이 되어버린 상황을 우려하는 시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견이 정치적으로 가시화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에서는 젊은 층의 정치 이탈이 심각하다. 2021년에 있었던 국회의원(중의원) 총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은 30%에 겨우 턱걸이하는 정도였다. 인구가 많은 70대 고령층에서 70%가 넘는 투표율이 나오면서 전체 투표율을 55%까지 끌어올렸지만, 이 역시 높은 수치는 아니다.
물론 일본 정치 전반을 둘러싼 상황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경제, 외교, 문화, 혹은 지진이나 지진해일이 빈발하는 자연재해 등 일본 사회를 둘러싼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관련돼 있고, 그 결과 정치가 심각한 ‘동맥경화’에 시달리고 시민 사회에서도 정치적 무기력이 팽배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물음이 생긴다. ‘일왕’이라는 상징적인 군주 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도 엄연히 헌법에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명시된 ‘민주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국체를 규정한 법률과는 별도로, 일본 사회가 과연 국민 주권의 원칙에 의해 굴러가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 ‘전후민주주의’와 ‘다이쇼 데모크라시’
일반적으로 일본의 민주주의는 1945년 패전 이후 ‘외부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뒤 7년 동안 일본은 연합국의 점령군의 통치하에 있었다. 이 시기에 지금의 일본 사회의 기본적인 틀에 해당하는 사회 시스템이 대체로 정비되었다. 예를 들어, 점령군의 최고 기구인 연합군최고사령부(General Headquarter의 약자인 GHQ라고도 부른다. 이하 ‘GHQ’)에 의해, 여성참정권을 인정한 선거 제도의 도입, 노동자 단결권의 보장, 재벌 해체(경제 민주화), 교육의 민주화 등이 추진됐다. ‘일왕’을 오로지 상징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전쟁과 무력의 행사를 포기하겠다고 명시한, 이른바 ‘평화 헌법’도 이때에 제정된 것이다. 당시 GHQ의 기본 방침은 전쟁을 정당화했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배척하는 한편, 서구 사회의 민주주의가 일본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적인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그것이 일본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고 쟁취한 것이 아니라, 외부 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식’된 결과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시스템 자체는 민주적일지 몰라도, 시스템이 만들어진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딘가 뒤틀린 민주주의의 시작이 지금의 일본 시민 사회의 무기력의 근본적인 원인일지도 모른다.
사실 일본에서도 민주주의가 자생적으로 싹텄던 시기가 있었다. ‘다이쇼 시대(1912~1926년)’에 일어난 민주주의의 바람이라는 뜻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패전 이후에 GHQ에 의해 이식된 서구식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후 민주주의(戦後民主主義)’라고 하는데, 전쟁 이전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구분하기 위한 용어다. 다이쇼 시대는 일본에서 매스미디어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모던’한 도시 문화가 차츰 등장하던 때다. 신문과 잡지의 발행 부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대중 문학이나 영화, 레코드 등도 유행했다. 자유주의적인 사상과 근대적인 소비문화를 경험한 도시의 중산층, 이주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류의 사회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인 사상가가 민주주의와 유사한 ‘민본주의’ 사상을 제창했고, 여기저기에서 민중 봉기와 풀뿌리 운동이 터져 나왔다. 노동자나 농민의 자발적인 결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평등한 선거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쌀값 안정, 여성 참정권, ‘하층민’에 대한 차별 철폐, 파업권 보장, 교육의 자유화, 대학의 자치권 등 운동의 내용도 다양했다.
◇ 스스로의 힘으로 일군 민주주의의 소중함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일장춘몽처럼 사라지고 만다. 일본 열도에 몰아친 거센 군국주의에 밀려 힘을 잃었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반대로 스스로 운동 세력의 힘이 약화되면서 군국주의와 전쟁에 힘을 보태는 결과가 됐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운동 세력이 정부에 요구했던 핵심적인 사안 중 하나는 보통 선거의 실시였다. 그때까지는 정해진 금액 이상 세금을 내는 25세 이상 남성만 투표를 할 수 있었는데, 세금 납부와는 무관하게 모든 이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끈질긴 요구가 성과를 거두었다. 1925년에 세금 납부와는 무관하게 25세 이상 남성이라면 모두 투표할 수 있는 보통선거가 제도화된 것이다. 여성 투표권은 인정하지 않는 등 제한적이었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성과라고 부를 만한 정치 분야의 진일보였다. 그런데 이로 인해 운동세력의 요구사항이 해소돼 버리면서 운동의 원동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확고한 이념적 목표를 가진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다. 정치, 교육, 문화 등 개별적인 사안과 관련한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풀뿌리 운동들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한계는 분명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때에 만약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흐지부지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일본 사회의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부자연스럽고 냉소적인 무기력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외세에 의해 ‘이식’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낸 민주주의라면, 적어도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 의식은 훨씬 높지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니 한국은 총선이 코앞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사회 전체가 선거 국면의 정치 담론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어떻게 보자면 이런 열띤 분위기야말로 스스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성과라는 생각도 든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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