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삼성·SK 반도체가 한국을 떠난다면
SK하이닉스는 지난 4일 미국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달러(약 5조2000억원)를 투자, 반도체 후공정 공장을 세우고 오는 2028년 하반기부터 인공지능(AI) 반도체 핵심 부품인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을 생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올 연말 가동을 목표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약 170억달러(약 23조원)를 들여 500만㎡(150만평)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반도체 회사가 미국을 생산기지로 택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AI 시대 수요처인 미국 빅테크 기업들을 공략하는 동시에 천문학적 보조금 혜택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삼성전자가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60억달러(약 8조원) 이상의 칩스법(반도체지원법) 보조금을 받을 것이라고 지난달 보도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로부터 총 6억8570만달러(약 9200억원) 규모의 보조금과 세액공제 혜택을 받고, 이와 별도로 칩스법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일본, 유럽 등은 반도체 기업 유치를 향한 ‘돈풀기 경쟁(money race)’에 혈안이 돼 있다. 미국에선 올 11월 대선 전후로 조 바이든 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반도체 기업 유치 경쟁이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주 정부 차원에서도 첨단 시설인 반도체 공장 유치에 적극적이며, 세계적 수준의 대학들이 즐비하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투자 건에 대해 “인디애나주 정부가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선 것은 물론이고 지역 내 반도체 제조 인프라도 풍부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은 반도체 보조금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대기업 특혜’라는 야당의 반대로 직접적인 보조금 지급은 물 건너갔고, 투자비에 대한 15%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K칩스법’이 작년 3월에서야 통과됐다. 미국의 칩스법이 발효한 2022년 8월보다 반년 넘게 늦은 시점이었다. 4·10 총선을 앞두고 나온 공약에서도 국민의힘은 “주요 경쟁국의 지원에 대응할 수준의 보조금 지급 추진”을 제시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반도체 투자세액공제 일몰기한(2024년 말) 추가 연장”을 언급했을 뿐이다.
1980년대 한국 정부는 ‘전자공업 육성 방안’과 ‘반도체산업 종합육성대책’을 수립해 저리 대출부터 세금 감면까지 포괄적인 지원에 나섰다. 수도권에 반도체 공장을 짓게 허가해줬고, 용수와 전력을 사용하는 데도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됐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송전선 문제와 용수 문제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주 52시간제와 중대재해법 등으로 반도체 공장을 건설·운영하기에 만만치 않은 곳이 됐다. 글로벌 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우리 기업들은 투자여건이 양호하고 친기업 국가·지역에 추가적인 생산기지를 두는 것이 유리하다.
최근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인 ASML은 기반 시설투자 부족으로 해외 이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작년 11월 총선에서 이민 제한을 내건 극우 정당이 승리한 후 네덜란드 의회가 고숙련 이주 노동자에 대한 세제 혜택을 없애 인력난이 심화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네덜란드 정부는 ASML을 잡기 위해 총 25억유로(약 3조7000억원)를 긴급 투입, ASML 본사가 있는 펠트호번 인근에 주택·교육·교통·전력망을 확충·정비하기로 했다.
만약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투자여건 악화를 들어 “한국에 더 이상 반도체 공장을 짓지 못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우리 정부와 국회는 어떤 명목으로 이들을 붙잡을 것인가. 그때도 파격적인 지원책을 내놓기는 커녕 대기업 특혜 타령만 하면서 떠나겠다는 기업들을 비난할 것인가. 반도체 기업을 전폭적으로 돕는건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라는 입지를 지키는 동시에 반도체 주권국가가 되기 위한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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