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모래바람도 조선의 젊은 열정은 꺾지 못했다
[손관승의 영감의 길]
발로 쓴 해외 견문록
이기지의 ‘일암연기’
꽃 소식과 함께 황사도 찾아왔다. 300년 전의 여행자 이기지(1690~1722)의 자취를 따라가던 날도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의 청나라 여행기 ‘일암연기(一菴燕記)’는 조선 사신단이 황사로 고생하는 장면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동악묘 앞에 도착하자 뒤쪽에서 세찬 바람이 일었는데, 먼지와 모래가 하늘을 뒤덮어 지척에 있는 사람과 말조차 분간할 수 없었으며” 숙소로 돌아와 “급히 양치하고 세수하였으나 치아 사이에서 여전히 모래 가루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고 기록한다. 이전 사신단은 황사로 호마(胡馬)를 잃어버렸을 정도로 북방의 모래바람은 골칫거리였다.
1720년, 숙종의 사망과 경종의 왕위 계승을 승인받기 위한 사신단이 꾸려졌을 때 부친 이이명이 책임자로 임명되자 그는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동행하게 된다. 조선에서 해외로 나갈 기회란 사신단이 전부였으며, 정사와 부사 그리고 서장관에게는 집안사람을 데리고 중국 견문 기회를 주었으니 곧 자제군관 제도였다. 비공식 수행원이었기에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는 대신 공식 일정에서는 벗어났다. 강희제 시절 외국 사절에 대해 감시가 심하고 제약도 많았지만 서른 살 이기지의 호기심을 막기 힘들었다. 문금(門禁) 통제에도 불구하고 북경 골목길 후퉁(胡同)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세상을 체험한다. “태평거를 타고 돌아가는 여인이 많았다. 거리에는 술과 음식, 비단, 갖가지 노리개, 서화, 연죽, 의복, 진기한 물건 등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조선 사신 숙소는 전통적으로 옥하관이었지만 ‘대비달자(大鼻㺚子)’, 코 큰 야만인(러시아)에게 밀려 법화사로 바뀌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조선은 인조가 청나라에 치욕당한 이후 청일전쟁 때까지 258년간 494회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명나라 때까지 합하면 이보다 훨씬 많다. 일본 학자 후마 스스무가 지적한 것처럼 음풍농월 추상적인 감상기가 지루하게 하거나 심지어 이전 기록을 베낀 뒤 날짜만 바꿔 펴낸 여행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기지의 책은 발바닥으로 쓴 여행기답게 객관적 숫자에 충실하고 행간마다 약동하는 기운이 느껴진다. 관상대를 찾아가 혼천의 등 천체 관측 장비를 살펴보려 한 것이나 서양 선교사들을 열 번이나 만나는 장면은 압권이다.
당시 북경에 세 성당이 있었는데 마테오 리치가 세운 중국 최초 성당이자 소현세자와 인연이 있는 남당(南堂)을 자주 찾았다. 서양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데다 선교사는 과학자이며 엔지니어,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이기지는 세종의 아들 밀성군의 후예로서 수학과 이공학에도 두루 밝은 융합 지식인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필담을 섞어 천문과 지리, 예술 전반에 관해 진지한 담론을 나누며 자명종의 완전수가 10이 아닌 12인 이유를 묻고, 비루한 안목을 씻어버렸다며 감격한다. 서양인에게서 받은 대접도 남다르다. “서양 떡 30개를 내왔다.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박계와 비슷했는데,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고 했다.”
서양 떡은 카스텔라와 파운드케이크로 추정되며, 답례로 서양인들에게 조선의 시루떡을 내놓는다. 열려 있으면서도 당당하고,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자세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헤밍웨이 작품, 연암의 ‘열하일기’처럼 ‘일암연기’에도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인생의 보편적 가치를 무겁지 않게 풀어주는 비결이다. 하이라이트는 서양 와인을 접하는 장면. “포도주 색이 검붉고 맛은 매우 방렬(芳烈)하여 상쾌하다. 입에 들어갈 때는 상쾌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러워 그 맛을 형언할 수 없었다. 선인(仙人)의 음료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지는 귀국 직후 안타깝게도 신임사화로 부친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의 기록은 후세에 전해졌다. 젊은 여행자가 대륙에서 맛본 자유의 달콤함과 이국적 체험은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 그랜드투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상상해 보라! 포도주를 사이에 두고 조선 선비가 서양인과 담론을 나누는 낭만적 풍경을! 이기지보다 60년 뒤의 여행자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홍대용의 발언을 빌려 고백한다. “일암 이기지 같은 분은 식견이 탁월하여 후인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네. 특히 그 식견은 중국을 잘 관찰한 점에서 아주 잘 드러나지.”
포도주와 카스텔라는 지적 갈증과 낯선 문화 욕망을 자극하는 상징이었다. 연암도 북경에서 비슷한 체험을 내심 열망하였지만 아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대신 조선 최초 열하 방문 특종기 의미로 ‘열하일기’라 제목을 붙인다. 연암, 홍대용뿐 아니라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추사 김정희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중국 방문 후 혁신적 스타일의 여행기를 연속으로 내놓는다. 주자학의 근엄함에서 벗어나 실학, 북학이라는 신선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제목은 유명하지만 읽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지만, 정치판에 혼탁한 황사가 불고 삶에 고전(苦戰)할 때는 고전(古典)에서 지혜와 영감을 얻을 필요가 있다. 오랜 시간 살아남은 책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여행자 이기지는 간절히 변화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입고출신(入古出新), 옛것을 파고들다가 새로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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