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어지러운 총선 공약, 그래도 옥석은 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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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비용 의무추계에 총선 예외인 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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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과 조직관리에 골몰, ‘정책 정당’ 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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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공약 가려내는 유권자 선택 중요해져
“국민은 민생·저출생·경제재생 등 이른바 ‘3생(生) 정책’ 추진을 기대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민 1만2000명을 대상으로 선호 공약을 조사해 그제 발표한 결과다. 국민은 22대 국회가 추진해야 할 최우선 정책 과제로 민생(33.6%)을 뽑았다. 저출생 문제 해결(22.7%)과 경제 재생(기업 지원 12.3%, 자영업 지원 12.3%)이 뒤를 이었다. 예금자 보호한도 상향, 주4(4.5)일제 도입 기업 지원, 결혼 출산 지원금 지급, 청약통장 지원 확대, 채용갑질 근절, 근로소득 세액공제 기준 및 한도 상향 등이 유권자 선호 공약 윗자리에 올랐다. 조사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공약을 대상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유권자들이 새 국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엿보게 해준다. 꼭 많은 재정을 넣지 않아도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조치가 적지 않고, 그런 실질적인 일에 나서달라는 것이다.
이번 총선에선 유독 포퓰리즘 공약이 많이 쏟아졌다. 포퓰리즘 정책치고 민생으로 포장되지 않은 것도 드물다. 포퓰리즘 공약을 가르는 기준은 결국 실현 가능성이다. 공약 이행을 위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흔들지 않아야 실현 가능한 공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야가 부각한 총선 공약 상당수는 이런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친다. 여당의 생필품 부가가치세 한시 인하와 소상공인 부가세 간이과세 대상자 확대, 야당의 1인당 25만원의 민생회복지원금 등이 재정 부담이 큰 대표적 공약이다. 서울 올림픽대로 지하화나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착공 등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한 공약도 한둘이 아니다. 한국 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 따르면 이번에 286개 공약을 내놓은 민주당은 공약 이행에 4년간 266조5165억원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모두 301개 공약을 제시한 국민의힘은 소요예산 추계를 아예 제출하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 ‘묻지마 공약’이 넘쳐난 데에는 제도적인 허점 탓도 있다. 공약 이행 절차와 기간, 재원 조달방안 등을 공직선거 출마자의 선거 공보물에 못 박도록 의무화한 공직선거법 66조가 대통령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는 적용되지만 총선은 예외다. 가령 기초자치단체가 4곳인 강원 춘천-철원-화천-양구갑의 총선 출마자는 공약 비용에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지방선거에서 춘천시장이나 화천군수에 출마하면 공약 실행계획을 내야 한다. 이는 상식에 어긋난다. 선거관리위원회가 2016년 총선에서도 공약비용을 의무적으로 추계하도록 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정책 경쟁이 부진한 데에는 무엇보다 정당 책임이 가볍지 않다. 팬덤과 조직 관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정당의 이념과 정강에 맞는 정책 개발엔 소홀한 게 현실이다.
돈 드는 공약뿐만 아니라 경제를 멍들게 하는 공약도 걱정이다. 조국혁신당은 대기업 임금 인상은 자제하고 중소기업은 높이는 사회연대임금제를 공약했다. 격차 해소라는 선의로 포장했지만 대기업 고임금을 부른 강력한 정규직 노조 문제와 중소기업의 감당 능력은 도외시했다. ‘조국식 사회주의’라는 여당의 비판이 나올 만했다.
결국 나쁜 공약은 거르고 좋은 공약을 가려내는 유권자의 선구안이 중요하다. 좋은 공약이 평가받아야 정당도 좋은 정책으로 경쟁하려는 유인이 생긴다. 막말이 난무하고 함량 미달의 후보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지금 같은 선거 문화에 실망하지 말고, 우리 삶을 지키고 미래를 준비하는 공약을 골라보자. 비록 흡족한 선택은 아닐지라도 차선 혹은 차악의 선택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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