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보다 '대파', 무능이 부른 정권심판 봉인해제
22대 총선 투표가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선거 결과의 예측에 관심을 갖는다. 좋은 일이다. 이것은 투표의 과정에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소선거구제 하에서 양당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경우에는, 유권자들이 '전략적 투표'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느 쪽에 표를 던지면 어느 정당이 얼마나 이기고 질지, 또 그에 따라 선거 결과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감안해서 표를 던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항상 맞지는 않지만, 이렇게 열심히 고민해서 투표를 결정하는 것이 나쁠 리 없다.
그것은 내가 투표한 후보가 꼭 당선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역에서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고, 지역에서 뽑을 후보가 없더라도 정당 투표를 할 수도 있다. 그 둘을 다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좋다. 그것은 전적으로 유권자의 권리다. 물론 투표를 안하는 것보다는 어느 한 쪽에라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그런데 이렇게 투표를 하면서 내가 한 생각이 과연 맞는 것인지를 잘 알려면,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총선 프레임에 대해 좀 더 폭넓은 이해를 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선거 결과에 따라서 정권심판론, 야당심판론, 거대야당 심판론 같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유의미한가 하는 점이다.
정권심판을 불러온 대통령의 행보
이번 총선에서는 정권심판론과 야당심판론 중 무엇이 크게 작동하고 있을까? 현재까지의 추세를 보면 정권심판론 쪽이 더 강해 보인다. 우선 야당심판론이 작동하려면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좀 높아야 한다. 그래야 야당이 발목잡기를 한다는 비판이 설득력이 있다. 단순히 야당의 지지율이 낮다고 해서 야당심판론이 작동하기는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운동권 심판론이나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도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래서 실제로 여당의 야당심판론은 선거 캠페인에서도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다.
그럼 정권심판론은 어떤가? 국면의 차이는 좀 있었다. 일단 국정지지율이 너무 낮게 오래 유지되었기 때문에 정권심판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특히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는 확실히 정권심판론이 강했다. 그런데 여당의 리더십이 교체되고 민주당이 공천 파동을 겪으면서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
전략적인 노력도 있었다. 대통령 주변인에 대한 부정부패 의혹이 있다면, 선거 시기에 대통령이 잠시 뒤로 빠져있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1~2월에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공천 잡음이 있고 나서 여야의 지지율이 백중세를 보이자, 대통령이 다시 등장했다.
대파가 모든 것을 정리하다
3월 18일, 하나로마트 '대파 사건' 이후, 잠시 사라졌던 정권심판론이 분명하게 재등장했다. 여당으로서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대통령은 4월 1일, 의대 정원 관련 담화로 양문석, 박은정 후보 논란이라는 야권의 악재도 한순간에 지워버렸다. 이 두 사건은 다시 정권심판이라는 선거 아젠다를 불러 일으키는 데 충분했다.
여당이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윤·한 갈등'은 2차례나 벌어졌지만, 결국 여당이 대통령실을 이기지 못했다. 한번은 고개를 숙였고, 다른 한 번은 이긴 것 같았지만 오히려 세게 뒤통수를 맞았다. 황상무 수석과 이종섭 대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느끼기도 전에 대통령의 담화가 나왔던 것이다.
일부에서 내각 총사퇴나 대통령 탈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그런 내홍이 중도층을 견인하기는커녕 그나마 있던 지지층을 오히려 더 분열시킬 가능성만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독재에 대한 심판일까?
이번 총선의 강력한 프레임이 정권 심판이라면 무엇에 대한 심판일까? 흔히 야당들이 말하는 검찰독재와 우경화에 대한 심판일까? 그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지난 2년 동안 정부 견제론과 정부 지원론에 대한 의견, 또 여야 지지율이 일정하게 유지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 몇 달 간만 보더라도 여론은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국정지지율은 지속적으로 낮았지만, 정부 견제론이 지속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과거를 돌아봐도 시기적으로 중간평가 선거라고 모두 정권심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16대 이후 6번의 총선에서 야당이 이긴 경우는 2번 밖에 안된다. 그럼 뭘까? 실마리가 있다. 갤럽조사에서 정부 견제론과 정부 지원론이 재역전된 시점은 정확히 '대파 사건' 때였다.
국민은 늘 정권의 '무능'을 심판했다
우리 선거에서 대체로 정권에 대한 심판은 정치적 좌우보다는 '민생에 대한 정부의 무능'에 대한 심판이었다. 지표상으로만 뉴스를 장식하던 경제가 '대파'를 통해 민생이라는 분명한 실체를 만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왜 살기 어려운지 이해하게 되었다.
대통령이 든 대파는 대파에서 머물지 않고, 이태원, 잼버리, 엑스포라는 3대 악재, 그리고 R&D 예산 삭감, 의료 대란을 상기시켰다. 정부가 국민들의 삶에 진정한 관심이 없고, 그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부패한 정부라도 유능하다면 참을 수 있다. 비전이 없어도 당장 버틸만하다면 용납할 수 있다. 그러나 부패하고 비전도 없는 정부가 '무능'하기까지 하면 용납하기 어렵다. 요컨대, 좌든 우든 사람들은 살만 하다면 일단은 두고 본다. 그러나 무능은 다르다.
박근혜는 왜 탄핵됐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민들이 분노했던 이유는 최순실(최서원)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의 권위를 호가호위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기 때문이 아니다.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제 맘대로 고쳤다고 해도, 그 사실만으로는 탄핵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한 이유는 무능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의 도움을 받아서 외교 문제를 능란하게 해결하고, 평창올림픽 준비를 잘 해내고, 심지어 세월호 사태 당시에 유능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이 '국정농단'을 심판했을까?
마찬가지로 검찰 독재정부라는 비판이 아무리 거세고, 홍범도 장군 동상을 어떻게 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정권 심판론이라는 장작에 불이 붙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을 것이다.
윤 정부 하에서 참사가 없었고, 잼버리의 성공적 개최와 엑스포 유치로 국위를 선양하고, 의대 증원을 착실하게 준비해서 이뤄냈다면, 정권 심판은 쉽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 주변의 개인 비리 의혹이 지금보다 더 컸어도, 그런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고 사후방지를 약속한다면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은 무능한 정부를 보면 그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이유는 항상 차고 넘친다. 유능한 정부는 우연으로 가능하다. 전두환 정부에서 우리나라는 3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우연이 없다. 김영삼 정부에서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유능한 정치를 강제하는 제도
어떤 독자는 민주주의를 너무 폄훼한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그렇지는 않다. 민주주의는 본래 나쁜 사람(들)도 좋은 통치를 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는 제도다. 민주적 정당성에서 비판을 받는 정부는 항상적인 위기에 시달린다. 그래서 그 위기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유능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통치의 방식이 비민주적인 경우에도 정권이 유지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좋은 정부가 되려면 정치적으로 민주적이거나 경제적으로 유능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정부여당이 패배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어떤 기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모두 승리한 보수정당이 다시 한 번 큰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야당이 승리한다고 해도, 그것이 꼭 좋은 일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여론조사를 살펴봐도 야당이 스스로 잘해서 선거에 이긴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야당 역시 정부여당에 대한 심판론만 말하지, 정치적 정당성이나 경제적 유능함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야당이 마치 자신들이 잘해서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하다면, 앞으로 2년 뒤, 3년 뒤의 선거는 또 다른 양상이 될 것이다.
물론, 아직은 총선 결과도 확신할 수 없다. 야당에는 아직도 논란이 있는 후보들이 있다. 야당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총선 이후의 야당이 어떻게 할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관후 정치학자(kwanhu.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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