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투표는 신중하게 심판은 단호하게
시골 형님댁 큰방의 텔레비전 옆 유리찬장은 작은 책장이기도 하다. 상단에는 오래된 밥그릇과 제기 몇 개, 양초와 성냥. 그 밑으로 노랗게 변한 농민신문과 합천이씨 족보와 조카들의 졸업앨범, 거창군지 그리고 낡은 추리소설 몇권과 최신 유행가요집. 오늘 내 눈에 특별하게 띄는 건 두툼한 옥편이었다.
큰절로 인사 드리고, 이런저런 안부 나누고, 올해 사과농사 소식도 들으며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바둑을 두는 형님들 옆에서 옥편을 빼들었다. 나는 요즘 점 복(卜)에 대한 생각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기둥 하나 세우고, 그 기둥에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의 손잡이인 양 점 하나로 쾌활하게 마무리하는 글자가 ‘卜’이다. “卜자는 점이나 점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 고대에는 달궈진 쇠꼬챙이를 거북의 배딱지에 지져 갈라진 모양과 소리에 따라 길흉을 점쳤다.”(네이버 옥편)
불과 2획이지만 뜻이 만만찮고 이에 기댄 글자가 제법 된다. 한번 쓰고 나면 공통적으로 그 기둥 바깥을 만져보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한자들. 박, 외, 부는 종종 손가락으로 공중이나 허벅지에 쓰면서 저 바깥의 의미를 헤아리기도 한다. 朴(박/나무의 바깥), 外(외/저녁의 바깥), 訃(부/말의 바깥). 그러다가 옥편과 더불어 생각을 더 공글리면서 여러 곳에서 위력을 떨치는 卜을 만났다. 卦(괘), 赴(부), (와), 卞(변), (복) 등등. 그리고 이날 큰집 옥편에서 망외의 글자 하나를 새로 발굴했다. (부). ‘人+卜=사람의 바깥’이니 ‘엎드리다, 죽다’라는 뜻이다.
이들과 결을 달리하지만 아래를 뜻하는 ‘下(하)’도 참 고마운 글자다. 한바탕 울기 좋은 광야처럼 수평으로 한 획을 그은 뒤, 지구가 너무 커 둥글어질 수밖에 없듯, 그 대지는 너무 넓어 바깥이 아래일 수밖에 없듯, 다시 수직으로 한 획 뻗고 마지막 한 점을 찍을 때 바닥의 손잡이를 열고 그 어떤 바깥을 뚫고 나가는 후련함!
한편, 선거할 때 기표 도장에는 동그라미 안에 비대칭의 문자가 있다. ‘사람 인(人)’이 아니라 ‘점 복(卜)’이다. 투표지를 반으로 접을 때 혹 인주로 인한 무효표를 방지하는 것이지만, 투표할 때 점치듯 신중하게 심판하듯 단호하게 도장을 찍으라는 뜻도 있는 것.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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