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의 좋은 정부 만들기]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면: 정책 정당을 위한 제안
며칠만 지나면 22대 총선이 끝난다. 말 많고 탈 많은(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며칠 새 또 어떤 황당한 일이 터질지 모른다) 이번 총선을 두고 역대 최악의 선거라고들 한다. 내가 어린 시절의 선거는 공공연히 ‘고무신과 막걸리 선거’라고 불렸고 득표수까지 조작한 부정선거가 4·19혁명의 발단이 되기도 했으니, 이번 선거를 ‘역대’ 최악이라고 하기는 무리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투표권을 행사한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내 기억으로도 이번 선거는 역대 최고의 비호감이다.
이번 선거를 최악이라 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다. 행정학자인 나한테는 정책선거는 실종되고 포퓰리즘이 판쳤다는 점이 가장 비호감이다. 선거는 유권자 지지를 확보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절차이다. 그러니 유권자가 좋아하는 공약을 내거는 것은 이해한다. 정책선거도 우리 당이 집권하면(혹은 내가 당선되면) 무슨 정책을 하겠노라고 제시하면, 유권자가 자신이 선호하는 공약을 내건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정책선거는 포퓰리즘과 다르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공약의 타당성 여부인데, 간단히 말하면 재원 조달 문제다. 소요 재원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 정책을 실행해도 정부 재정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으면 타당한 정책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포푤리즘이 된다.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 비판 나와
포퓰리즘이 극성이라 이번 총선을 최악이라고 하면, 후보자들을 비롯한 정당의 총선 관계자들은 억울할 수 있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포퓰리즘이 난무하지 않았던 선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책선거는 여태껏 구현된 적이 없는데, 왜 시비하느냐고 따질 법하다(혹은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코웃음 칠 수도 있다).
포퓰리즘 선거라는 게 늘 있었던 일인데도 유독 비판이 거센 것은, 그만큼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오래전, 삼성의 고 이건희 회장은 우리나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말을 했었다. 본인은 이 말 때문에 곤욕을 치렀지만, 우리의 정치·행정·기업 수준을 제대로 평가한 것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세 집단의 수준은 어떻게 변했을까? 기업을 보자면 삼성을 비롯해서 세계적인 일류기업이 여럿 나왔다. 행정학자로서 평가하면, 우리 행정은 1류라고는 못해도 최소한 3류는 훌쩍 벗어났다. 사실 순전히 행정적 측면만 따지면 제법 경쟁력이 있다. 행정이 욕먹는 데는 잘못된 정치적 결정 탓이 크다. 문제는 정치다. 기업은 상전벽해가 되었고, 행정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정치만은 구태의연이다. 아니,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나는 그 이유를 정책 정당의 부재 때문이라 진단한다. 당대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것, 이를 통해 유권자 선택을 받아 정권을 잡는 것, 이게 정책 정당과 정책선거의 모습이며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구현이다.
과거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시대, 그러니까 민주화 이전에는 관료가 정책을 주도하고 행정부가 통치했기에 정책 결정에서 정치의 역할은 작았다. 오늘날 정치의 정책 역할은 민주화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커졌다. 이 때문에 정치가 발목 잡는다며 관료들의 불만도 크다. 그러나 이게 정상이다. 시대의 난제를 해결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정치가 제시한 기본 틀을 구체화해서 집행하는 것이 행정의 몫이다. 구슬이 서 말이면 어떻게 꿰느냐에 따라 보배가 될 수도 있고 흉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갈이 서 말이면 아무리 잘 꿰어도 쓰레기 신세 면하면 다행이다. 한번 따져보라. 우리 사회 주요 정책의 대부분은 정치·행정 타협의 산물이다. 그런데 정치 비중이 큰 정책일수록 좋은 정책은 찾기 힘들다.
정책역량을 키워서 명실공히 정책 정당이 되게 하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나라에서도 적극 지원한다. 정당들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다. 금년에 예정된 규모는 1000억원이 넘는다. 국민 세금으로 정당을 지원하는 이유는 정치를 잘하란 뜻에서이다. 이런 취지를 살리라고 보조금 사용에 일정한 제약을 둔다. 대표적으로 경상보조금의 30% 이상은 각 정당의 정책연구소에서 사용해야 한다. 좋은 정책 개발하라고 그리 정해 놓은 것이다. 여의도연구소와 민주연구원 정도면 매년 50억원 내외를 받을 것 같다. 보조금뿐만 아니다. 정부는 정책연구위원이라는 명칭의 77명의 별정직 공무원을 여야 정당에 배정한다. 각 정당의 정책개발을 도우라는 목적이다. 국민의힘에 33명, 더불어민주당에 44명이 배정되어 있다. 이들의 급여는 당연히 국민 세금에서 나간다.
정당법 ‘직원 수 제한 규정’ 손봐야
이처럼 많은 돈과 인력을 각 정당의 정책개발에 지원하는데도 왜 정책 정당이 안 될까?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그중 정당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정당법 제30조이다. 이 법은 각 정당의 직원 수는 중앙당 100명, 시도당 100명을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규모로 거대정당을 운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정책연구소 연구위원 명목으로 채용한 뒤 중앙당에 파견하고, 별정직 공무원인 정책연구위원으로 하여금 시도당 업무를 돕게 한다. 정책연구를 소홀히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규정이 현실과 괴리되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한다.
정당 직원 수를 제한한 것은 20여년 전 ‘차떼기’로 불리는 정치자금 비리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정당이 커봐야 비리만 는다는 인식에서 정당 규모를 줄이고 정치자금 모금도 제한하였다. 여전히 정당 행태가 미덥지 못하기에, 이런 제약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이런 족쇄를 유지하는 한, 정책 정당은 요원하다.
이를 푼다고 해서, 정당들이 정책개발에 얼마나 진심이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다. 최소한 핑계 대기는 어렵겠다. 나는 22대 국회가 시작되면 정당법 그리고 정치자금법이 현실에 맞게 고쳐지길 바란다. 자기들 밥그릇 키우는 것으로 비칠까 봐 부담된다면, 나와 동료 학자들이 물꼬를 트겠다. 중이 제 머리 깎기 힘들면 중생들이 나서서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주) 이 글을 쓰기 위해 윤형중 LAB2050 대표의 주간경향 1543호 칼럼 ‘정책 정당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참조하였다.
김태일 고려대 교수·좋은예산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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