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마구잡이 정책 남발에 권역외상센터는 고갈될 지경 [왜냐면]

한겨레 2024. 4. 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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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1일 오전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윤수 | 대전을지대병원 권역외상센터 교수

ㄱ선생, 잘 지내고 있는지요? 분명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병원을 떠나 있는 상황에서 잘 지내고 있냐고 묻는 것이 미안하네요. 그래도 이럴수록 외과 의사를 시작한 첫 마음 잘 간직하길 바랄 뿐입니다. 지난해, ㄱ선생이 외상외과에 파견 와서 함께 중증외상 환자를 살렸죠. 상태가 안 좋은 환자를 함께 수술하고 여러 처치를 함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어 두려워하던 ㄱ선생이었지요. 그러나 하나씩 배우고 함께 치료하는 환자가 살아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반짝이는 ㄱ선생 눈빛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느 날, ㄱ선생이 넌지시 외상외과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너무 기뻤지만,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죠. 더 적극적으로 이곳의 보람과 기쁨, 장점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아끼는 후배 외과 의사에게 힘든 이 길을 추천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ㄱ선생도 잘 아는 것처럼 요즘은 권역외상센터뿐 아니라 모든 의사, 특히 응급환자들과 매일 만나고 있는 의사들에게 암담한 상황입니다. 더 이상 권역외상센터에 후배 의사들, 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전문의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강압적인 국가정책으로 그 길을 꽉 막아버렸습니다. 의과대학 6년, 수련과정 4~5년 합쳐 10년 이상 지나야 배출하는 전문의, 미리 누군가에 의해 ‘낙수과 전문의’라고 이름 붙은 사람이 바로 권역외상센터에 필요한 인력입니다. 2000명 의대 정원을 당장 늘린다고 하더라도 10년 후 과연 권역외상센터로 새롭게 들어오는 전문의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낙숫물을 기다리기 전에 당장 우물물이 말라서 권역외상센터는 고갈될 실정입니다. 파견 와서 본 것처럼 권역외상센터를 지키는 전문의, 교수들 평균 연령이 곧 50살이 됩니다. 전국 다른 권역외상센터도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아직 정부는 현장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마구잡이 정책만 남발합니다. 이른바 ‘미니 의대’ 몇십명 정원을 200명으로 대폭 증원 발표하였습니다. 도지사, 대학 총장이 나서서 당장 몇백억원을 들여 건물을 짓고 교수 100명을 채용한다고 합니다. 의대 교수들이 사직 운운하는 상황에서 인력은 어떻게 채용하며, 몇백억원은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일까요? 재원은 결국 서민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세금일 것입니다. 2024년 권역외상센터 지원 예산은 577억원이며 전국 권역외상센터 운영 지원과, 나와 같은 전담 전문의 인건비, 전공의 교육 등에 쓰이는 세금입니다. 세금으로 해마다 몇천명 목숨을 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도권 외상센터에 외상외과 전문의가 편중되어 있고 지방에는 인력 부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외상외과 의사들이 부족하며 떠나고 있는지 복지부는 고민을 해보았는지 의문입니다.

다시 ㄱ선생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합니다. 아마 천재지변이 아니라면 ㄱ선생이 전문의가 될 내년에도 나는 권역외상센터에 있을 예정입니다. 매번 당직 근무, 밤과 새벽 시간에 중증외상환자들을 만나면 숨이 꽉 막히고 체력적, 정신적 한계를 느낍니다. 하지만 죽음 문턱에 한 발 걸쳤던 환자가 살아나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그 감동이 내년에도 외상외과를 계속하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허울뿐인 ‘필수의료 패키지’라고 이름만 붙인 정책, 초등학교 산수보다 못한 짜 맞춘 ‘2000명 정원 확대’라는 헛다리 정책뿐입니다. 본질을 모른 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우물물조차 말라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현재 외상외과 의사, 곧 외과 전문의가 되어 외상외과 의사를 꿈꾸는 모두를 허탈하게 만들고, 발이 푹푹 빠져버리는 갯벌 같은 현실을 만들었습니다. 일시적 보조금, 수가 인상 등 검증 없는 정책을 남발하고 있으나 이 또한 절대 갯벌을 아스팔트로 만들 수 없습니다.

ㄱ선생보다 먼저 외과 전문의가 되고, 외상외과라는 사명감과 희열을 알아버린 채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버렸네요. 정부는 몇년 지나면 무용지물이 될 건물에 몇백억 세금을 낭비할 게 아니라, 현재도 밤과 새벽을 지키며 중증외상환자들을 살려주는 권역외상센터, 전국의 모든 의료진에게 관심과 지원이 더 필요합니다. 10년 뒤 이른바 낙수효과로 극소수 전문의를 만들어보겠다는 2000명 증원 정책보다 당장 전공의 과정, 현재 필수과 의사들에게 지원을 더 우선해야 합니다. 정부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정책 방향을 잡는다면, 나도 ㄱ선생에게 자신 있게 외상외과 의사 길을 권하겠습니다. 그 길은 힘들지만 생명을 살려주고 보람과 가치 있는 길이 분명하며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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