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윤석희 인권위원의 경고, “인권위를 감시하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법규집’ 등 한아름 들고 온 자료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2021년 2월 인권위 비상임위원으로 임기를 시작한 윤석희 변호사가 ‘인권위와 함께한 3년’은 자료와 고군분투한 시간이기도 했다. 많을 땐 한 주에 1000쪽이 넘는 기록을 읽었다. 인권위 업무에 전념하는 상임위원과 달리, 비상임위원은 전업이 따로 있다. 윤석희 인권위원은 주경야독하는 심정으로 낮엔 본업을 하고 밤엔 기록을 살폈다. 토요일, 일요일 중 하루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인권위원은 윤석희 변호사가 하고 싶었던 일이다. 1994년 변호사가 된 뒤, 한국여성변호사회에서 활동하며 오랫동안 성폭력 피해 여성, 가정폭력 피해 아동, 디지털 성착취 피해 여성 등에 대한 공익 변론을 지원했다. 이런 경험이 인권 개선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인권위 활동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2022년 5월 국회와 각 정당 대표에게 정치 영역에서 성별 불균형을 개선하라고 권고(‘성평등한 정치 대표성 확보를 위한 권고의 안’ 통과)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직접 정책이나 제도를 집행하진 않지만, 윤석희 인권위원이 생각하기에 인권위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기구다.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은 인권위의 문을 두드린다. 인권위가 내린 결정은 인권 친화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지렛대 구실을 한다. 윤석희 위원은 “인권위가 지금 위기에 처했다. 인권위를 감시해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송두환 인권위원장을 포함한 11명 인권위원의 합의제 기구인 전원위원회(전원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인권위원들 사이에 합의점을 찾는 일이 요원해졌다. 도대체 인권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3월15일 3년 임기를 마친 윤석희 인권위원을 만났다.
최근 전원위가 연달아 파행됐다.
전원위가 사실상 멈췄다. 다음 전원위(3월25일)에서 다룰 ‘장애인단체 대표자의 장애 비하 발언’을 포함한 세 건은 일곱 번째 다시 상정되는 안건이다. 그 전에 전원위가 여섯 번 열렸지만, 안건을 다루지 못할 정도로 회의가 진행되지 않았다(3월11일 열린 전원위는 5시간 가까이 진행됐지만, 그날 상정된 안건 다섯 건 중 한 건도 의결하지 못했다). 최근 전원위에서 잇따라 고성이 오갔다. 몇몇 인권위원은 ‘모두발언’을 명분으로 2시간씩 일방적인 주장을 한다. 안건을 두고 충분히 논의해야 할 전원위가 본연의 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전원위가 인권침해 진정 등 안건을 심의하지 못하는 건 곧 인권의 후퇴다.
김용원 상임위원이 3월11일 전원위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자꾸 꺼내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냐”라고 말했다.
‘타령’이라고 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타령’을 언제까지 할 거냐는 거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할 여성차별철폐협약 관련 독립보고서에서 중요한 두 가지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다. 그 부분에 반대하면서 나온 이야기인데, 그런 폭력적인 언어는 같은 회의에 참석하는 동료 인권위원에게도 깊은 상처를 준다. 김용원 위원은 송두환 위원장에게 ‘말버릇이 없다’라고 하고, 사무처 직원들에게 ‘사무처 따위’ ‘오만방자’라는 등 쉽게 폭언을 한다. 이충상 상임위원은 혐오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기저귀 발언’이 (성소수자 혐오라는 비판을 받자) ‘과학적’이라고 해명했다(이충상 위원은 “게이가 스스로 좋아서 항문성교를 하여 항문이 파열되어 기저귀를 차는 경우가 있는 것은 객관적 과학적 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게 혐오라는 걸 모르는 거다. 두 사람 다 인권위원으로서 자질이 매우 의심스럽다.
인권위원 11명은 국회·대통령·대법원장이 추천해 구성된다. 최근 유독 파행이 잇따른다.
생각이 달라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김용원(윤석열 대통령 지명)·이충상(국민의힘 추천) 위원은 사안을 매우 정치적으로 본다. 서로 다른 세 기관에서 인권위원을 지명하는 건 인권위가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다. 인권위원에게는 ‘인권적 관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설령 각 정당에서 추천받더라도 그 정당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인권위원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운동에 관여할 수도 없다(인권위법 제10조 제2항). 그런데 두 위원은 “인권위가 민주당 법안도 반대해야(이충상 위원)” “위원장은 지극히 좌편향적(김용원‧이충상 위원)” 같은 정치적 발언을 자주 한다. 인권위를 정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이전에는 어떻게 달랐나.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에서 추천한 이상철 전 상임위원(2019년 9월~2022년 10월)과 침해구제 제2위원회(침해2소위)에서 함께 오래 일했다. 침해2소위는 주로 구금시설이나 지방자치단체 등 국가기관에 의해 겪은 인권침해 안건을 다룬다. 이상철 전 위원은 ‘기각하는 안건을 더 열심히 봐야 한다’라는 중요한 말을 남겼다. 인권위 사무처 조사관은 해당 진정이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인권위원에게 기각 안건으로 올린다. 그런데 인권위원들이 사무처 의견과 달리 ‘권리 구제가 필요하다(인용)’라고 판단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기각’으로 올라온 안건을 더 꼼꼼히 보라는 거다.
김용원 위원은 지난해 8월 자신이 위원장을 맡은 침해구제 제1위원회(침해1소위)에서 위원 3명의 의견이 불일치한다는 이유로 안건을 기각했다. 이른바 ‘자동 기각’이다.
소위원회 위원 3명 중 한 명만 반대해도 해당 진정이 ‘자동 기각’이라는 인권위 규정은 없다. 소위원회 회의는 구성위원 3명 이상의 출석과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인권위법 제13조 제2항). ‘자동 기각’은 이 대목에서 ‘의결’이 ‘가결(인용)’만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법 규정은 입법자의 의도뿐만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 해석되어야 한다. 진정 ‘각하’ 후 의견을 표명하는 것도, 진정 ‘기각’ 후 부대 의견을 다는 것도 하나하나 모두 ‘의결’이다. ‘자동 기각’ 결정에 반발한 시민단체가 기각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내기도 했다(김용원 위원은 그 이후에도 침해1소위 위원 3명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정을 ‘자동 기각’했다). 그러한 법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법원의 판단을 기다릴 때까지는 종전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말해도 듣지 않는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인권침해 진정을 넣은 진정인들, 인권침해 피해자들에게 간다. ‘자동 기각’으로 피해를 구제받기 어려워지면, 피해자들이 자포자기하고 피해를 호소하지 못하고 위축될까 봐 염려된다.
지난해 11월 김용원·이충상 위원이 감금 등을 이유로 군 사망사건 유가족들을 수사 의뢰했고, 3월13일 경찰이 유가족 소환조사를 진행했다.
김수정·원민경 위원과 함께 유가족들이 더는 피해 보지 않도록 신속히 수사를 마쳐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혐의 여부를 판단하는 건 수사기관의 몫이다. 다만 군 사망사건 유가족은 국가기관에 의해 피해를 본 분들이다. 그리고 인권위는 그들이 호소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기관이다. 인권위에 호소하러 온 유가족들이 오히려 피의자가 돼 경찰 조사를 받았다. 피해자가 구제를 요청할 권리조차 막으려는 시도가 아닌지 심각하게 보고 있다.
임기 3년 동안 아쉬웠던 순간이 있다면?
우선 3월11일 전원위에서 여성차별철폐협약 관련 독립보고서가 의결되지 못한 게 아쉽다(3월25일 전원위에 해당 안건이 세 번째 다시 상정된다). 2022년 화물연대 총파업 때 업무개시명령이 나온 데 대해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측면에서 김수정·서미화·석원정 당시 위원과 함께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상 업무개시명령 관련 제도 개선 권고 및 의견 표명의 건’을 전원위에 상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김용원·이충상 위원이 전원위 상정을 반대해) 상정되지 않았다. 인권위원 11명은 각자 지명된 기관도, 경력도, 시각도 다르지만, 인권이라는 관점과 인권 감수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한 팀이다. 타인이 처한 환경을 느끼고, 이해하고, 용인하는 능력이 감수성인데, 이 감수성이 없는 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위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나머지 위원들이 방향타를 잘 잡고 있는지, 거기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인권위가 역행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언론이 인권위를 주시해야 한다.
이은기 기자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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