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자폐를 생각한다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4. 4. 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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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자폐인은 세번 해방됐다. 첫번째는 1942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 리오 카너가 사회적 무관심, 반복 행동, 동일성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어린이를 ‘자폐’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로써 자폐는 정신박약, 바보, 백치, 조현병이란 오해에서 해방됐다. 두번째는 1988년 영국의 정신과 의사 로나 윙이 ‘자폐는 스펙트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엄격한 진단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자폐로 진단했다. 당연히 자폐는 매우 드물었다. 로나 윙은 4년간 수많은 발달장애 어린이와 부모들을 만나면서 큰 문제를 깨달았다. 자폐의 특징을 모두 나타내는 사람은 매우 드물지만, 일부만 나타내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쉽게 말해 진단 기준이 열개라면 열개 모두 충족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다섯개를 충족하는 사람은 훨씬 많으며, 두세개만 충족하는 사람은 무척 흔했다.

문제는 두세개만 충족하는 사람도 너무나 힘겹게 산다는 것이었다. 명문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가도 인성 나쁜 놈, 사회성 떨어지는 인간으로 낙인찍혀 거리를 떠돌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이들을 도우려면, 자폐 진단을 붙여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이로써 자폐는 도덕적 비난과 차별의 굴레에서 해방됐다.

자폐 진단 기준은 1980년대 후반부터 계속 넓어지고 있다. 이제 꼭 어린이가 아니라도, 말을 할 줄 알아도, 공부를 잘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쳐도 자폐 진단과 함께 필요한 치료, 교육, 중재를 받게 됐다. 자폐인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당연하다. 1980년 1만명당 4명꼴이던 자폐인은 1990년에 1만명당 70명, 현재는 1만명당 270명 수준으로 약 70배 늘었다. 자폐 자체가 늘었다기보다, 항상 존재했던 사람들이 비로소 자폐로 진단받으면서 생긴 현상이다.

세번째 해방은 1998년 그 자신이 자폐인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학자 주디 싱어가 ‘신경 다양성’이란 개념을 창안한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존재이며, 누구나 어떤 측면이 덜 발달한 대신 다른 측면이 발달할 수 있다. 그러니 자폐, 난독증, 주의력결핍과다활동장애(ADHD) 같은 상태를 능력 부족과 기능 이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독특한 장점을 지닌 인지적 변이로 보자는 것이다. 이로써 자폐는 열등한 상태란 편견에서 해방됐다.

이처럼 세 가지 해방을 통해 자폐인 스스로 긍지를 갖고 자기 삶을 축복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폐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능력이 크게 다른 사람들이 자폐라는 범주 속에 하나로 묶였다. 끝없이 반복하는 끈질김, 무서운 집중력, 세부를 놓치지 않는 철저함 등 자폐 성향을 강점으로 삼아 첨단기술계, 학계, 경제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소위 ‘고기능 자폐인’이 늘면서 관심이 집중된다. 이들은 언어적 소통이 가능한 경우가 많아 활발하게 소통하므로 자폐 서사, 나아가 장애 서사에서 이들의 경험과 견해가 과잉 대표되기도 한다.

연전에 화제를 모은 ‘우영우 신드롬’이나 현재 출판계에서 작은 트렌드를 형성한 자폐인 자서전 형식의 책에서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자신의 의사를 전할 수 없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심지어 혼자서는 밥을 먹거나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힘든 중증 자폐인들이 여전히 많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조기 진단, 특수치료, 통합교육, 취업 지원, 생활 지원 등의 사회적 서비스는 이번 정부 들어 답보 상태이거나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과학기술계나 출판계와 마찬가지로, 장애 분야 역시 실체도 불분명한 ‘카르텔’을 잡는다며 이해할 수 없는 예산 삭감에 직면해 있다.

온 나라가 정치의 물결에 휩쓸려 있지만, 오늘은 4월2일. 세계 자폐인의 날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며, 모두 귀한 존재. 그 ‘다름’을 축복하며,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고통을 한번 더 돌아보고 공감하는 날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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