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섬유의 반도체, 스판덱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섬유, 스판덱스는 1959년 미국 화학 기업 듀폰이 처음 만들었다. 여성 속옷용 고무의 대체재로 개발됐다. 고무는 오래 쓰면 늘어나고 급격히 탄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스판덱스는 원래 길이의 7배까지 늘어나면서 강도가 고무의 3배나 돼 속옷용 고무를 대체하기에 최적의 소재가 됐다.
▶듀폰은 “잘 가, 헐렁한 팬티!’란 광고를 앞세워 여성 속옷 시장을 석권했다. 패션 아이콘 오드리 헵번에게 스판덱스 바지를 입혀 일반 의류로도 용도를 확장해 갔다. 1970년대 여성 해방운동 여파로 스판덱스 소재 거들 판매가 격감하자, 듀폰은 에어로빅 의상에 스판덱스를 집어넣었다. 레깅스 바지의 시초인 셈이다. 1968년 동계 올림픽에선 프랑스 스키팀에 스판덱스 스키복을 입혀 다시 붐을 일으켰다. 수영복, 등산복, 스키니 청바지 등 용도가 계속 확장됐다. 특수 섬유 12겹으로 만드는 우주복에도 몸에 잘 밀착되도록 맨 안쪽 층은 스판덱스가 들어간다.
▶스판덱스란 명칭은 ‘늘어나다’라는 뜻의 영어(ex/pand/s)를 거꾸로(s/pand/ex) 뒤집은 것이다. 폴리우레탄에 특정 화학물질을 섞어 만든다. 현미경으로 분자 구조를 보면 위아래 단단한 섬유층 사이에 코일 모양의 섬유질이 결합돼 있다. 양쪽에서 당기면 코일 섬유가 펴지면서 늘어나고, 놓으면 코일이 감기면서 수축한다. 배합된 원료를 방사(紡絲) 기계를 이용해 실로 뽑는데, 배합 비율과 방사 공정은 기업의 1급 비밀이다.
▶듀폰에 뒤이어 일본 기업들이 1970년대에 스판덱스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에선 태광산업이 일본 기업 기술을 빌려 스판덱스를 처음 만들었다. 한국이 종주국 미국을 제치고 스판덱스 세계 1위 생산국이 된 것은 1992년 효성이 제조법을 독자 개발한 덕분이다. 엊그제 타계한 조석래 효성 회장이 1989년 연구소에 “독자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오너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개발팀은 3년간 숱한 시행착오 끝에 세계에서 네 번째로 스판덱스 제조법을 찾아냈고 글로벌 1위 업체에 올랐다.
▶현재 전 세계에서 고품질 스판덱스를 양산하는 기업은 한국의 효성, 미국의 인비스타(듀폰의 후신), 일본의 아사히카세이 등 세 회사 정도다. 효성은 중국, 베트남, 튀르키예, 브라질 등 7국에 생산 거점을 구축, 연 20만t을 생산하며 세계 시장을 30% 이상 점유하고 있다. 스판덱스는 높은 기술 장벽 탓에 고부가가치 섬유의 위상을 갖고 있다.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 분야에서 세계 최강이 된 것은 조석래라는 남다른 기업가의 도전 정신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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