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면 톱 공백으로 낸 WSJ... “러에 구금된 그의 기사가 여기 있어야”
전세계 수감 언론인 520명 넘어... 러 41명, 우크라 침공 후 급증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지난 29일 자 종이 신문을 배달받고는 적잖이 당황했다. 언론사에서 그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사로 채우는 1면 톱기사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혹시 인쇄 사고인가 의심했지만 신문 상단에 쓰인 제목을 보고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한 남성의 얼굴 삽화와 함께 영문 대문자로 ‘그의 기사가 여기 있어야 한다(HIS STORY SHOULD BE HERE)’라고 적혀 있었다. 이 남성 이름은 에반 게르시코비치(Gershkovich·33), WSJ 소속 주(駐)러시아 특파원으로 한 해 전인 지난해 3월 29일 러시아의 대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취재를 위해 이동하던 중 러시아 방첩 기관인 연방안보국(FSB)에 붙잡혔다. WSJ은 이날 특집 4개 면을 만들어 그의 현재 소식과 가족들의 심경, 2014년 이란 테헤란에서 체포돼 544일간 옥살이를 했던 워싱턴포스트 기자의 인터뷰 등을 전했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 이날 미 언론들은 일제히 게르시코비치에 대한 기사를 전했다.
그는 미국과 구(舊)소련 사이에 이어졌던 냉전이 끝난 후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첫 미 언론인이다. 소련 이민자의 아들로 미 뉴저지에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신문사 ‘모스크바 타임스’에서 일하다 2022년 WSJ에 입사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명령을 받아 국가 비밀인 러시아 군산복합체 소속 기업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며 체포 이유를 설명했다. 구체적 증거는 공개하지 않아 사실상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두고 미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현실을 반영한, 정치적 이유에 따른 체포라는 평가를 받는다. 게르시코비치가 체포되기 전 썼던 기사는 ‘러시아 경제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서방 경제 제재로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국가 기밀과는 무관했다. 러시아에서 간첩죄로 유죄 평결을 받을 경우 그는 최대 20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WSJ 등에 따르면 그는 소련 시절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져온 레포르토보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1881년 군(軍) 수용소로 지어졌다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 비밀경찰의 가장 혹독한 구금 시설로 변환했다. 고문실이 갖춰져 있고 죄수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고 처형까지 하는 용도로 쓰여 왔다. WSJ은 “그는 세상과 단절된 채로 하루의 90%를 좁은 감방에서 회색 감옥 벽을 바라보며 보낸다”고 했다.
게르시코비치는 하루 한 시간만 감방 밖으로 나와 운동을 할 수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 축구팀인 아스널의 소식은 경기 후 2주는 지나야 들을 수 있다. 그의 재판은 항상 비공개로 진행되고 사진이나 짧은 영상만 러시아가 골라 공개한다. 법정 심리 때 스쳐 지나듯 보여지는 모습을 보며 그의 가족들도 그의 생사 여부를 눈으로 확인한다. 사실상 러시아 정부 통제하에 있는 법원은 그의 수감 기간을 계속 연장하고 있다. 가장 최근 재판이 있었던 지난 26일, 법원은 그의 구금 기간을 오는 6월 30일까지로 또다시 연장했다. 이날 린 트레이시 주러시아 미국 대사는 법정에 나와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허구다. 러시아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 시민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 정부는 게르시코비치가 체포된 뒤부터 석방을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9일 낸 성명에서 “저널리즘은 범죄가 아니다. 그는 기자로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잔혹한 침략에 진실의 빛을 비추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자유 사회의 기둥인 언론을 공격하거나 언론인들을 표적으로 삼는 모든 이들에게 계속 강하게 맞설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이 아예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푸틴은 2월 전(前) 폭스 뉴스 앵커 터커 칼슨과 가진 인터뷰에서 게르시코비치와 2019년 독일에서 수감된 러시아 요원이 교환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유로운 저널리즘은 ‘사실에 근거한 선거’를 국가의 바탕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존속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역으로 러시아·중국 등 전체주의 국가에선 자유 언론이 체제의 위협으로 여겨져 기자들을 탄압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홍콩의 ‘중국화’ 등의 영향으로 감옥에 갇힌 언론인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국경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31일 현재 전세계적으로 언론인 527명과 기타 미디어 종사자 24명이 수감돼 있다. 이 중 러시아에 수감된 언론 관계자가 41명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특별 군사 작전’이라고 부르면서 ‘전쟁’ 또는 ‘침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를 어긴 혐의 등을 받는다.
중국·미얀마·벨라루스엔 러시아보다 많은 언론인이 수감 중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론인이 수감되어 있는 국가는 중국(112명)이다. 중국에 수감 중인 언론인 중 다수는 2014년 시작된 중국 당국의 신장 자치구 탄압 과정에서 체포됐다. 이 단체는 “홍콩판 국가보안법으로 홍콩에서도 독립 언론에 더 큰 제한이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란은 이슬람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사망한 마흐사 아미니의 소식을 처음으로 보도한 기자를 ‘미국과 공모 혐의’로 체포하는 등 언론인 26명을 가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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