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염에도 노래한 조수미…기적 같은 15분이었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후두염 조수미, 인대파열 잉키넨
난관의 연속에도 8000회 가능성 보여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행진곡 풍의 음악이 시작되자, 조수미는 개선장군처럼 무대로 걸어나왔다. 원조 ‘클래식 스타’의 입장에 객석에선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함성이 터졌다. 급성 후두염에 걸렸음에도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무대에 선 그는 도니체티 오페라 ‘연대의 딸’ 중 ‘모두가 알고 있지’를 들려줬다.
이날의 공연에선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의 명성과 위상, 그를 향한 한국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었다. 후두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이어갔고, 1절을 마친 뒤엔 “2절”이라며 여유로운 무대 매너로 관객들에게 깨알 같은 웃음을 안겼다. 5분 길이의 곡을 마친 뒤에 승리를 확인한 장군처럼 씩씩한 경례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무사히 노래를 끝낸 후, ‘현실의 조수미’로 돌아온 그는 잉키넨 감독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고는 지쳐 쓰러질 듯한 연기로 관객에게 또 한 번 웃음을 안겼다. 지난 2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KBS교향악단의 제800회 연주회에서였다.
무대를 마치고 마이크를 잡은 조수미는 “저 때문에 며칠간 걱정 많으셨죠. 제가 후두염 때문에…”라며 우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노래할 때와는 달리 조수미의 목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한 음절 한 음절을 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고, 목소리는 떨리고 갈라져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무대에 선 것은 KBS교향악단의 800회 연주회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조수미는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라며 “KBS교향악단의 첫 공연은 저의 스승님이신 이경숙 교수(서울대)님이 협연자로 섰는데, 800회엔 제자인 제가 공연을 하게 됐다. 800회를 넘어 80000회가 될 때까지 사랑과 응원을 보낸다”고 했다.
목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조수미는 “관객 분들이 이렇게 오셔서 그냥 가시는 게 너무 마음이 안 좋아 앙코르 곡을 준비했다”며 “해외에서 외로울 때마다 부르는 곡”이라며 직접 피아노를 치며 안정준의 ‘아리아리랑’을 선보여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조수미가 이날 무대에 머문 시간은 15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150분 보다 값진 ‘기적의 15분’이었다.
당초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이여’,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아, 그대였던가’까지 부를 예정이었던 조수미의 공백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채웠다. KBS교향악단 관계자는 “김봄소리 씨가 다른 연주 일정으로 한국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연락했는데 무대가 성사됐다”고 귀띔했다.
1956년 12월 20일, 명동의 시공관에서 제1회 정기연주회를 연 KBS교향악단은 지난 68년의 긴 시간 동안 악단을 이어오며 마침내 800회의 시간을 맞았다. KBS교향악단도 대대적으로 준비해온 연주회였지만, 사실 이날의 공연은 여러 면에서 돌발상황이 끊이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조수미는 급성 후두염이 찾아왔고, 음악감독인 피에타리 잉키넨은 인대 파열로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대체 투입된 김봄소리는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연주했으나, 공연 중 잠시 바이올린을 멈출 때엔 통증으로 불편한듯 손목을 계속 돌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설상가상의 위기 속에서도 KBS교향악단의 제800회 정기연주회는 모든 면에서 빛났다. 김봄소리는 악단 사이로 숨지도 파묻히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도 자신의 음색을 발산했다. 김봄소리 특유의 집중력이 흐트러짐 없이 음악을 끌고 나갔고, 1악장 독주 파트에선 활기를 잃지 않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냈다. 2악장에선 금세 표정을 바꾸듯 봄날의 정원에 찾아온 듯 따뜻하고 온화한 소리로 분위기를 전환했고, 3악장에선 다시 열정적이고 현란한 기교로 내달리며 김봄소리의 이름을 증명했다.
레스피기의 ‘로마 3부작’은 이날 연주회의 메인 디쉬였다. 3부작 중 ‘로마의 소나무’는 KBS교향악단이 몇 차례 연주한 적은 있지만, 3부작 전곡을 연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로마 3부작’은 ‘로마의 분수(1916)’, ‘로마의 소나무(1924)’, ‘로마의 축제(1928)’로 구성된 관현악 시리즈로 로마의 역사와 명소를 그림처럼 묘사했다.
공연에선 ‘로마의 축제’,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로 공연이 이어졌다. 화려하고 강렬한 관현악의 매력이 살아나는 ‘로마 3부작’에서 가장 마지막에 작곡된 ‘로마의 축제’는 마치 비극적인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음악을 시작했다. 곧 엄청난 위험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졌고, 그 위를 숨가쁘게 내달리듯 불길한 관악기들이 쉴 새 없이 터져나왔다. 2악장에 이르면 종소리처럼 맑은 소리에 단조풍 현의 선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고, 민속춤을 추는 듯한 흥겨운 탬버린과 뿔피리 소리가 관객들의 어깨도 들썩이게 했다. 4악장에 이르면 현대곡으로 분위기가 달라지나 난해하고 불편한 음악은 아니었다. 마디 마디 꽉꽉 채운 악기들의 향연으로 음악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았고, 관객도 숨쉴 틈 없이 축제에 빠져들었다.
신비로운 분위기로 시작한 ‘로마의 분수’는 엄청난 박진감으로 내달리지 않았지만 목가적인 선율을 유연하고 우아하게 그려갔다. 레스피기 3부작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로마의 소나무’는 화려하고 화사한 색채로 문을 열며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분산화음과 글리산도가 흩뿌려진 1악장을 지나 따듯한 관악기가 종교적 경건함을 그리고, 몽환적 선율의 피아노에 클라리넷, 오보에, 트럼펫이 얹어지며 환상 동화같은 이야기를 만든다. 군대의 발소리같은 팀파니가 우아한 몸짓으로 문을 연 4악장에선 세련된 빌드업으로 나아가며 벅찬 마침표를 찍었다.
십자인대 파열로 포디움에 함께 오른 의자에 앉아서 지휘한 잉키넨은 악단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KBS교향악단의 지속가능성을 입증했다. 초대 음악감독인 임원식을 시작으로 9대 음악감독인 잉키넨의 시대에 접어들 때까지 KBS교향악단은 꾸준히 성장하고 진화했다. 이날 800회 연주회는 8000회까지 나아갈 KBS교향악단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됐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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