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수도권 전기공급’ 태안의 한숨…“탈석탄 공감, 노동자 생존은?”
“20년 넘게 청춘을 바친 일터지만 기후위기 시대에 석탄발전소 폐쇄는 불가피한 것 같아요. 봄엔 황사, 여름엔 폭우와 폭염, 겨울엔 한파가 더 심해지는 걸 보면서, 어떻게 반대하겠어요. 마냥 반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더 슬프네요.”
내몽골 고원지대에서 불어닥친 황사로 전국이 ‘나쁨’ 수준의 고농도 미세먼지로 뒤덮였던 지난 30일, 충남 태안 서부발전 본사 앞에 서 있던 송상표(52)씨가 잿빛으로 변한 하늘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관련기사 2면
송씨는 태안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서부발전의 1차 하청업체인 금화피에스시(PSC)에서 기계 유지·보수 일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송씨가 다루는 화석연료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혀 전세계에서 퇴출 대상 1호로 꼽히고 있다. 우리 정부도 ‘탄소중립 2050 계획’에 따라 전국의 석탄화력발전소 59기 중 28기를 2036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한다는 계획을 세워놨다. 당장 송씨가 근무하는 태안화력발전소만 해도, 내년부터 1~2호기를 시작으로 2032년까지 순차적으로 발전소 6기가 폐쇄된다.
송씨는 “한평생 석탄밥 먹으면서 전기를 생산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는데 빨리 사라져야 할 ‘기후악당’ 취급을 받고 있어 서럽다”면서도 석탄발전소 퇴출이란 ‘대의’에는 동의했다. 일터에서 석탄 분진과 매연, 미세먼지를 매일 접하면서 화석연료의 위해성을 누구보다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석탄발전소가 폐쇄되면 노동자 1만명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실제로 2022년 7월 사회공공연구원 조사 결과를 보면, 발전 5사 비정규직 노동자(응답자 약 2천명) 가운데 74%는 ‘고용이 보장된다면 발전소 폐쇄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발전비정규직노조 쪽은 당장 2년 사이 폐쇄될 발전소는 7개에 달하지만 고용 보장 인원은 절반에도 못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예로, 태안화력 1, 2호기는 구미와 공주에 들어설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로, 삼천포화력 3, 4호기와 하동화력 1호기는 각각 고성 발전소(LNG)와 안동복합 2호기로 대체되는데, 엘엔지 발전소의 가용 인력은 석탄발전소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노조 쪽에선 “게다가 대체 건설되는 공장 간 거리도 멀어 비정규직 처우로 태안이 아닌 다른 지역에 생계를 꾸리기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 게다가 태안화력발전소 정규직과는 달리,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달리 전환배치 계획이 전혀 없다. 정부는 2021년 7월 산업구조 전환으로 인한 실업 증가 피해에 대비해 발전분야 노동자 등의 신산업분야 직무전환 훈련 프로그램을 내놓았지만, ‘고용보장과 관계없는 한시적 교육’일 뿐이었다. 송씨는 “내년부터 발전소가 폐쇄되면 계약 인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 벌써 동료 간 경쟁과 갈등 조짐이 보인다”고 말했다.
송씨의 곁에서 함께 행진하던 부인 박아무개(45)씨는 일자리 불안 때문에 동네에선 가정불화가 잦아지는 집들도 있다고 전했다. “우리 집만 해도 둘째가 고3이에요. 남편은 아이들 대학 마칠 때까진 좀 더 버티고 싶다고 말하는데…. 애들이 어린 집일수록 불안감이 훨씬 커요. 다른 지역으로 직장을 옮긴다 해도 태안 집값으론 대도시에선 전세도 못 얻는 실정이니까요.”
송씨를 비롯한 충남 지역 석탄발전소 노동자와 시민 등 1천명이 이날 태안 도심 일대에서, 기후변화 대응 과정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불평등하게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정의로운 전환’을 외치며 행진에 나선 까닭이다.
이날 행진에선 석탄 묻은 방진복을 입고 참가한 청년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한전케이피에스(KPS)와 하청 계약을 맺은 ‘한강’에 속한 2차 하청 노동자인 김영훈(32)씨도 그들 중 하나다. “발전소 비정규직으로 일한 지 8년이 됐어요. 태안 토박이인데 이 지역엔 마땅히 일할 기업이 없어, 매일 석탄가루를 마시는 열악한 직업이지만 태안에선 이만한 직업도 없어 참고 버텼거든요. 그런데 당장 발전소가 없어지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될 것 같아요.” 김씨는 “선거철 ‘청년이 미래’라는 문구를 보면 화가 난다”고 말했다. “석탄발전소에서 일하는 청년들에겐 미래가 없잖아요. 많은 청년 정책이 나오는 선거철에도 석탄발전 노동자를 위한 공약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이곳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점점 더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태안은 현재 가동 중인 전국 59개 석탄발전소 중 10개가 몰린 지역이다. 일자리를 찾아 태안을 떠날 고민을 하는 김씨 같은 사람이 늘면서 ‘지역 소멸’ 우려도 커지고 있다. 발전비정규직노조 쪽은 태안화력발전소가 완전히 폐쇄되면 소속 노동자와 가족 등 약 6천명이 태안을 떠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태안발전소 인근인 원북면에서 10년 넘게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해마다 손님이 줄고 있는 걸 체감한다”며 “발전소가 없어지면 식당을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행진에 나선 노동자들은 공공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와 석탄발전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내용의 ‘공공 재생에너지법’과 ‘한국발전공사법’ 제정을 요구했다. 재생에너지 사업을 민간기업 손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발전 5사 같은 재생에너지 공공기업을 만들어 국가 에너지정책과 일자리 확보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태성 발전비정규직노조 전체대표자회의 간사는 “태안발전소는 ‘김용균 사망 사고’뿐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수도권 국민의 전기 공급을 위해 수많은 노동자가 희생된 곳이다. 정치권은 수십년간 전력산업 기수였던 석탄발전 노동자들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태안/글·사진 옥기원 기자 ok@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서울 용산·부산 남구 초접전…총선 승부 가를 ‘3대강 벨트’
- 이번엔 양배추 오픈런…한 통에 8천원도 한다
- 윤 대통령, 오전 11시 ‘의대증원’ 대국민 담화…“소상히 설명”
- [김훈 기고] 참사 10년…‘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 ‘경제 293번’ vs ‘범죄 322번’…이재명·한동훈의 프레임 전쟁
- 말소리만 들어도 까르르 웃는 딸…“아픈 티라도 내줬으면”
- 미 공화당 의원 “가자지구, 히로시마처럼 끝내야”…원폭 발언 논란
- 국힘 조해진 “윤 대통령, 국민에 무릎 꿇어야…내각 총사퇴”
- “암수술 절반 밀려…환자 상태 악화” 그래도 교수들은 진료 축소
- ‘노가리+생맥주’ 만든 을지OB베어가 을지로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