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FTA 20년, 글로벌 통상강국의 길 열다
2000년대 초 우리 정부가 FTA(자유무역협정) 추진 로드맵을 수립하고 다수의 국가와 FTA를 추진할 당시 '메기론'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메기론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원거리 운송할 때 수조에 메기를 넣으면 청어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유럽의 얘기인데, 한국으로 넘어와서는 논에 메기를 풀자 미꾸라지들이 살아남으려 노력해 더 살이 찐다는 얘기로 변형되었다.
2004년 한-칠레 FTA가 처음 체결된 후 2012년 한-미 FTA, 2015년 한-EU, 한-중 FTA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FTA가 체결되는 과정에서 상호 시장개방을 통해 우리 경제와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더 강화될 것이라는 메기론이 점차 현실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FTA 협상과 국회 비준 동의 과정에서 시장 개방에 따른 국내 관련 산업의 피해를 우려하는 다수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적절한 위기의식과 자극으로 우리 기업과 경제의 체질이 더 강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지난 20년간 우리나라가 체결한 FTA는 21건에 달한다. 59개 FTA 파트너들은 세계 GDP의 85%, 세계 인구의 61%를 차지하는 시장으로 우리 무역의 78%가 이들 국가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해 우리 기업들은 FTA 체결국으로 매일 14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13억 달러 이상을 수입하면서 매일 3조6000억원 이상의 물건을 사고 팔았다. 최근 5년간 이들 국가와의 무역은 연평균 5.5% 증가하면서 같은 기간 전체 무역의 연평균 증가율 5.1%보다 높은 성과를 달성했다. FTA가 교역 확대를 통한 편익 증대에 기여했다는 말이다.
FTA는 무역 규모 증가 외에도 우리 수출과 경제의 질을 높였다. 자동차, 가전, 화장품, 식품 등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프리미엄 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미 FTA 추진 당시 국내 영화 산업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했지만, K 콘텐츠는 넷플릭스와 빌보드, 그리고 아카데미와 그래미 시상식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유효자원을 총집결시켜 협상했던 경험과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이해관계자간 의견을 조율하고 피해산업을 돌아본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는 보다 성숙해지고 국력은 업그레이드되었다.
최근 지정학 리스크와 공급망 위기, 자국중심주의 확산으로 그 많은 FTA가 무슨 소용이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FTA는 영화속 절대반지나 인피니티 건틀렛처럼 천하무적일 수 없다. 그러나 FTA를 체결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못했던 일본이 IRA 직후 부랴부랴 핵심광물협정을 체결한 것이 그 반증이다. 금융위기,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 경제 회복의 견인차는 무역이었고, FTA가 없었다면 무역장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세계 무역이 동일한 규범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20년 전 우리가 칠레와 FTA를 체결할 때 지금처럼 세계 무역질서가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21건의 FTA는 우리 무역에 있어 일종의 보험과 같다. 보험 가입이 질병을 예방할 수는 없지만 막상 질병이 발생했을 때의 비용을 절감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감안할 때 FTA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시장과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상대국과 대화 창구를 쉽게 열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글로벌 통상규범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기후변화, 공급망, 디지털 같은 이슈가 그것이다. 산업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빅 블러(Big Blur) 현상이 나타나듯이 무역협정도 단순 상품의 관세 인하와 서비스 시장 개방을 넘어 새로운 의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달라진 환경을 반영해 기체결 FTA를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협상을 시도한다면 FTA는 지난 20년간 우리가 글로벌 통상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이바지했듯이 앞으로도 한국무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 기반을 강화하는 역할을 거뜬히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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