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기·도박판 전락한 한국 게임…'공돌이'는 죄가 없다

최우영 기자 2024. 3. 30.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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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인마켓]
무분별한 확률형 아이템 범람에 유저들 피로도 증가
'뽑기템 BM'에 재미 본 게임사 사업부서, 개발과정 관여
게임 본연의 재미 추구하는 개발사에 유저들 힘 보태야
[편집자주] 남녀노소 즐기는 게임, 이를 지탱하는 국내외 시장환경과 뒷이야기들을 다룹니다.
전병극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이 지난해 11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확률형 아이템 관련 게임산업법 시행령 개정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한국 게임, 특히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도박판'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확률형 아이템을 BM(비즈니스모델)으로 채택하고 있어서다. 캐릭터의 기본 스펙을 올리는 것부터 장착 아이템, 변신, 탈것, 소환수까지 '뽑기'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시행횟수를 늘려야 획득 확률이 높아지기에 손쉽게 과금을 유도할 수 있다.

말 그대로 '확률형' 아이템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운 좋게 금방 아이템을 얻지만, 대다수는 돈은 돈대로 쓰고 아무것도 못 얻어가는 경우가 많다.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을 쓰고도 성과를 얻지 못한 이들의 분노는 고스란히 게임사와 그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에게 향한다. 그런데 이런 BM은 게임 개발자들의 의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확률형' 대표 리니지도...과거엔 월 2만9700원짜리 게임
리니지 리마스터. /사진=엔씨소프트
한국 온라인게임 1세대 창업자들은 대부분 공대 출신 개발자들이었다.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넥슨의 김정주, 엑스엘게임즈 송재경 등이 그랬다. 꼭 공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컴퓨터 동아리 활동 등으로 코딩을 배우고, 개발에 뛰어든 이들이 주축이었다.

초기 '공돌이'들이 만든 게임 속 BM은 정액제와 부분 유료화 모델을 도입하더라도, 인게임 플레이에 치중하면 무과금 유저들이 충분히 중대과금 유저들과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확률형 아이템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리니지 역시, 최근 '패스' 개념처럼 월 2만9700원의 정액제 요금만 결제해도 플레이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당시 개발자들은 '게임성'에 집중했다. 스토리를 탄탄하게 하고, 그래픽의 디테일을 살리고,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유저들의 접속을 최대한 길게 끌고가는 게임의 근본에 집중했다. 그 결과 자연스레 게임사들의 외형이 커졌고 한국 게임산업 또한 성장할 수 있었다.
"양복을 입은 자식들이 모두를 X먹였다"
디스코 엘리시움. /사진=자움
게임사가 커질수록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경영'을 하기 위해서다. 공돌이들로 구성된 초기 기업은 재무, 회계, 홍보 및 마케팅, 영업 등의 분야에 수많은 문과 출신들을 끌어들인다. 코딩이나 게임은 잘 몰라도 '기업'은 아는 이들이다. 잘 나가는 맛집이 재료비 절감을 고민하고 제조 대기업이 공정 효율화를 추구하듯이, 이들도 게임사의 '재무 건전성 강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게임성'만 바라보던 개발자들과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1세대 개발자들 중 경영진과 불화 끝에 회사를 떠나 창업한 이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 이유다. 박관호 위메이드 창업자가 대표 사례다. 자신이 차린 회사를 매각하고 아예 사업에서 손을 떼는 창업자들도 일부 있었다.

개발자와 경영진의 불협화음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었다. 2019년 '디스코 엘리시움'을 출시한 게임사 '자움'이 지난 2월 정리해고를 단행하며 게임 핵심 개발진을 모두 없애버렸다. 디스코 엘리시움 작가로 활동했던 아르코 툴릭은 회사를 떠나면서 경영진과의 불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양복을 차려입은 자식들이 모두를 X먹였다."
양복쟁이들의 목소리 커진 게임업계
/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게임업계에선 점점 '사업부서'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들은 여러 게임사에서 초기 확률형 아이템 도입에 깊숙이 관여했다. 제한적으로 적용했던 확률형 아이템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릴수록 '양복쟁이'들의 입김은 더 거세졌다.
한 메이저 게임업체 출신 관계자의 증언은 이렇다. "처음엔 이미 만들어진 게임에서 어떠어떠한 요소에 확률형 아이템을 적용해보자는 수준의 제안이 있었다. 개발부서에서는 다른 의견들도 있었지만, 결국 경영진이 사업부서의 손을 들어주며 확률템 BM을 도입했다. 매출이라는 확실한 성과지표가 보이자 사업부서의 요구가 점점 늘어났다. 개발자보다는 사업부서 출신들이 더 빨리 임원을 달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한창 개발 중인 게임의 빌드에 개입하며 확률형 아이템을 넣으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게임 개발사' 아닌 '게임 대기업'만 남아
넥슨 판교사옥 전경. /사진=넥슨
이 같은 변화는 게임사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몸집이 커질수록 먹여살려야 할 직원들이 늘어나고, 이 떄문에 매출을 올리는 지름길인 확률형 아이템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 게임사들이 외형 성장에만 집중해 쉬운 길을 택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유저들이 확률형 아이템의 범람에 피로도를 느끼면서 오히려 게임사들의 역성장을 불러왔다는 목소리도 뒤따른다.
한 주요 게임사 개발본부장은 최근 업계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바라봤다. "2000년대 초중반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직원들은 전부 '게임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지금보다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열악했고, 처우도 나빴다. 최근 들어오는 직원들 중에는 게임에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수다. 물론 게임에 미친 사람들만 게임사에 필요하다거나, 그런 사람들만 들어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게임사를 그저 '처우 좋은 직장'으로 생각하며 들어오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확률형 아이템 아닌 '착한 BM'도 유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엔씨소프트 리니지W의 캐릭터 뽑기 아이템. /사진=리니지W 캡처
확률형 아이템의 범람에는 '유저'들의 역할도 컸다. P2W(Pay to Win) 기조에 맺춰 확률형 아이템에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을 쓰는 '고래 유저'들을 비롯해, 소과금 유저들마저도 꾸준히 '뽑기' 게임을 즐겨왔다.

결국 사업부서의 게임개발 관여, 급격한 게임사의 외형 성장, 개발자들의 지위 하락, 유저들의 호응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며 '확률형 아이템 천하'를 만들었다. 난국의 핵심으로 '유저'를 꼽는 목소리가 나온다. '뽑기템' 일색의 게임들을 시장이 외면해야 악순환이 끝난다는 것이다.

단기간에 유저들의 생태계가 바뀌진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도박판'이라고 욕하면서도, 끝내 과금을 이어가는 유저들이 나오는 게 한국 게임, 한국 MMORPG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MMORPG는 이미 검증된 유저층이 있고, 이들의 과금 성향도 한순간에 변하는 것이 아니다"며 "최근 패스상품 도입 등으로 확률형 아이템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간간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우영 기자 you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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