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의 패악에도, 국민은 민주정부 수립에 표를 던졌다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첫발 1948년 5·10 총선거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했다. UN 총회는 ‘UN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고 1948년 1월 호주, 캐나다, 중국 등 8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이하 UN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소련군 사령관은 UN위원단의 방북을 거부했고, UN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5·10 총선거는 국민이 직접 대표를 뽑아 헌법 제정 등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보통·평등·비밀·직접 4대 원칙에 입각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선거였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소련·북한의 반대, 대내적으로는 좌익 세력의 조직적‧폭력적 저항에 직면해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UN위원단 입국 이후 ‘단선‧단정(單選單政: 단독 선거‧단독 정부) 반대 투쟁’에 나선 남로당은 2월 7일부터 총파업 투쟁(2‧7 총파업)에 돌입했다.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 획책하는 UN위원단 반대한다!”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 반대한다!”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분단에 반대한다’는 남로당의 투쟁 명분은 한 꺼풀만 벗기면 소련과 북한 중심의 한반도 전역 공산화와 다름없었다.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김달삼 등 350여 명은 한라산 정상과 주요 고지에 봉화(烽火)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제주도 내 경찰지서 24곳 중 12곳, 우익 인사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번에도 폭력 투쟁의 명분은 단선·단정 반대, 통일 조국 수립 그리고 완전한 민족의 해방이었다.
좌익의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총선거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열기는 뜨거웠다. 투표에 참여하려면 4월 16일까지 선거인 명부에 등록해야 했는데, 남로당이 등록사무소를 습격해 등록 명부를 탈취하고, 선거사무원을 구타, 협박, 심지어 살해하는 패악을 저질렀음에도 총유권자 983만여 명의 79.7%인 784만여 명이 기간 내 선거인 등록을 마쳤다. 4월 3일 이후 무장 시위대와 군경 사이에 교전이 지속되었던 제주도에서도 유권자 대비 등록률은 64.9%에 달했다.
5‧10 총선거를 20여 일 앞둔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김일성은 평양에서 ‘전조선 제(諸)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를 개최했다. 남한에서도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151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김구는 서울을 출발하면서 방북을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빨갱이들도 피와 뼈를 같이한 우리의 동포다.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봐야겠다. 삼팔선을 베고 죽더라도 가야겠다”고 말했다. 김구와 김규식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방북은 ‘미·소 동시 철수 후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소련과 북한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데 이용됐다. 이승만은 “김일성 뒤에는 소련이 있다. 소련과 직접 회담한다면 몰라도 그 앞잡이인 김일성과 회담해서 무슨 성과가 있겠느냐”며 김구의 방북을 안타까워했다.
1948년 5월 10일 화창한 봄날, 한국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일요일인 5월 9일 실시될 계획이었지만, 주일(主日)에 선거를 할 수 없다고 기독교인들이 반대한 데다 한반도에 360년 만에 찾아온 금환일식(金環日蝕: 달이 태양의 둘레만 남기고 가려 태양이 고리 모양으로 보이는 일식)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하루 연기되었다. 하지 중장이 평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해 총선거를 실시한 덕분에 오늘날에도 한국의 주요 선거는 평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해 치러진다.
200개 선거구에서 각 선거구당 1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소선거구제였고, 임기는 2년이었다. 단선에 반대한 좌익과 중간파는 총선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입후보자들의 정치적 성향은 우익 일색이었다. 그럼에도 948명이 출마해 평균 4.7: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을’, 신익희가 출마한 ‘경기도 광주’ 등 정치적 실력자나 지역 명망가가 단독 후보로 출마한 12개 선거구는 무투표로 당선자가 확정되었다.
188선거구 1만3000여 투표소에는 선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유권자들이 몰려 장사진을 쳤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오전에 선거를 마쳤다. 총선거를 위해 전날부터 주류 판매가 금지되었고, 선거 당일은 상인들이 자진해 철시(撤市)했다. 투표함을 중심으로 긴장한 표정의 선거위원들이 둘러앉았고, 그 주위를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과 도끼, 죽창, 야구 방망이, 곤봉을 든 향보단(鄕保團)이 삼엄하게 경비했다. 당시 경찰 인력은 2만5000여 명으로 투표소 한 곳에 2명씩 보내기도 부족했다. 향보단은 부족한 경찰력을 보충하기 위해 경무부장 조병옥이 군정청 승인을 얻어 우익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준(準)경찰 기관이었다.
치안 당국은 선거가 ‘대체로 큰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고 평가했지만, 남로당의 ‘단선 저지 투쟁’은 선거 당일까지 이어졌다. 오후 8시 40분, 광희동 투표소에 괴한 4명이 나타나 수류탄을 투척했다. 유리창이 파손되고 선거위원장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과 향보단이 추적해 3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했다. 오전 9시, 장충동 투표소에 괴한 2명이 침입해 권총을 발사했다. 경찰과 향보단이 반격에 나서 1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했다. 오후 1시, 영등포구 선거사무소에 괴한들이 침입해 선거위원의 복부를 단도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도주했다. 오후 4시, 마포 공덕동 제7 선거사무소에 괴한들이 침입하여 수류탄을 투척해 부근에서 놀고 있던 아이 2명이 다쳤다. 3월 30일 이후 총선거 때까지 선거사무소 134곳, 관공서 301곳이 피습당했고 선거공무원 15명, 후보자 2명, 경찰관 51명, 경찰관 가족 7명이 피살되었다. 남산·북악산 등 전국 86곳에서 봉화가 올랐고, 방화 135건, 도로 및 교량 파괴 48건, 전화선 절단 541건 등 좌익 테러에 의한 인명과 재산 손실은 전시(戰時)를 방불케 했다.
5·10 총선거 이후에도 남로당은 관권을 동원한 총체적 부정선거였다고 선동했다. 하지만 5월 12일 오후 윤곽이 드러난 개표 결과 당선자 198명 중 무소속 당선자가 전체의 42.9%에 이르는 85명이었다. 제1당인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27.8%에 불과한 55명이었다. 미군정에서 여당 격이었던 한국민주당은 29명이 당선되는 데 그쳐 참패했다. 제주도의 선거구 3곳 중 2곳은 4·3사건의 영향으로 투표율이 과반을 넘기지 못해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등록 유권자의 최종 투표율은 95.5%였다. “단선에 참여하는 것은 죽음으로 단죄해야 할 매국 행위”라고 남로당이 겁박했지만, 국민은 민주 정부 수립을 향한 열망을 담은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참고 문헌>
이만재, ‘제1 공화국 초기 향보단·민보단의 조직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3집, 2017
한용원, ‘5·10총선거를 둘러싼 좌우익 간의 투쟁’, 한국사 시민강좌 제38집, 2006
허준호, ‘제주 4·3 전개 과정에서의 5·10선거의 의미’, 민주주의와 인권 제7-2집, 2007
황수익, ‘5·10총선거의 재조명’, 한국사 시민강좌 제38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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