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문화산책] 행복의 강펀치

김별아 소설가 2024. 3. 3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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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의사의 세계챔피언戰
편견과 물질주의에 날린 강펀치
허블·다다오·이상화도 한때 권투
다들 자기 삶의 승자가 되자

새된 종소리가 울리자 코너에 앉았던 두 선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링의 중심으로 뛰어든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닥쳐오는 공격을 방어하고, 급소를 노리며 상대가 긴장을 늦추는 순간을 기다린다. 가벼운 스텝으로 ‘나비처럼 날아가’, 빠르고 날카로운 펀치로 ‘벌처럼 쏘아’야 한다. 누적된 기록상 강자와 약자가 예측된다 해도 그것이 승부의 절대 기준은 될 수 없다. 정답은 오직 하나, 링 위에서 먼저 쓰러지지 않는 편이 승자라는 것.

지난 16일, 한국의 서려경 선수 대 일본의 요시카와 리유나 선수의 WIBA(여성국제복싱협회) 세계챔피언 타이틀매치가 열렸다. “인생은 닥치는 대로 해나가는 거 아닌가요?”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지지?” 현역 의사라는 희소성이 서려경 선수를 화제의 중심에 세우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언론 인터뷰에서 했던 당찬 말들에 끌려 한번도 직관한 적 없는 권투 경기를 예매했다.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국민 스포츠’였지만 지금은 비인기 종목이라서인지 세계타이틀매치 표 값도 크게 비싸지 않았다(한 달 전에 예매해서 50퍼센트 할인도 받았다).

고대 올림픽 종목인 권투는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스포츠다. 현대에 이르러 경기 방식과 규칙은 달라졌대도 주먹으로 치고받아 쓰러뜨리거나 쓰러지는 원리는 그대로이다. 스포츠일지나 맞으면 당연히 아플 것이다. 부와 명예를 한 방에 거머쥐기를 바라며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헝그리 복서’도 더 이상 없다. 그럼에도 사각의 링에 올라 원한 없는 타인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선수들의 몸짓은 필사적인 존재의 증명 같았다. 힘과 기술, 눈물과 피가 공존하는 권투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하고,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삶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런 격렬성에 이끌려서인지 시인 이상화, 건축가 안도 다다오, 천문학자 허블 등이 한때 권투 선수 생활을 했다. 에디트 피아프는 연인이던 프로 복서 마르셀 세르당의 죽음에 불처럼 뜨거운 ‘사랑의 찬가’를 헌정했다.

WIBA 세계챔피언 타이틀매치가 본행사이긴 하지만 오후 2시부터 KBM(한국복싱커미션) 4대 타이틀매치를 비롯해 20경기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드디어 제13경기로 서려경 선수가 링에 올랐다. 미니멈급(47.6㎏이하)인 만큼 예상보다 더 왜소해 보였지만 번쩍이는 눈에 결기가 대단했다. ‘하드 펀처’로 알려진 만큼 전적은 8전 7승 1무, 지금껏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강함을 드러내는 한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꼰대’인 나의 기우일지 모르지만, 승리와 패배를 모두 겪어 봐야 진정한 승부를 직면할 수 있지 않을까?

응원하며 긴장한 채 보아서인지 10라운드가 금세 끝났다. 아웃복서인 서려경 선수와 인파이터인 리유나 선수의 경기 결과는 아쉽게도 무승부. ‘투잡’이 너무 힘들어서 세계챔피언에 오르면 미련 없이 프로에서 은퇴하고 싶다더니, 그 시기가 미뤄졌다. 하지만 시합의 무게와 승부의 결과를 떠나 서려경 선수는 무엇에도 짓눌리지 않는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그곳에는 여성도 의사도 무엇도 없었다. 우울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중인 한국 사회에서, 지위나 소속이 아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찾는 고독한 파이터의 모습만이 돌올했다. 이제 알겠다. 질 수 없다는 그녀의 패기는 링 안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편견과 수치심과 욕망과 물질주의에 강펀치를 날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비록 챔피언 벨트는 거머쥐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자기 삶의 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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