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규격과 자격에 대한 단상

이해성 2024. 3. 30.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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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진보의 숨은 공신
글로벌 규격과 표준
인간 삶은 자격의 전쟁
의대 문제도 같은 맥락
정치인 자격은 무엇인가
분열 더 조장해선 안돼
이해성 테크&사이언스부 차장

일상생활과 산업의 근간은 전기다. 전기 없이는 몇 시간, 아니 몇 분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인공지능(AI)이 보편화되면서 전기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AI 성능을 높이려면 막대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샘 올트먼, 빌 게이츠 등 글로벌 빅테크 창업자들이 차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전(SMR), 초소형모듈원전(MMR)에 앞다퉈 투자하는 배경이다. 전력 기술에선 발전 자체보다 송전이 더 어렵다. 냉각수 조달을 위해 바닷가 근처에 지은 기존 대형 원전과 달리 SMR, MMR은 도시 곳곳에서 AI를 돌릴 수 있는 비밀 병기다.

원전은 인류가 상용화한 발전소 중 가장 효율이 높다. 신재생에너지 만능 도그마에 빠져 있던 유럽 각국도 원전으로 속속 돌아서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수출에 이어 폴란드로 수출을 타진하고 있는 우리 원전 기술이 있다. 한국전력기술 등이 개발한 원전 APR-1400이다. APR-1400을 적용한 새울 3호기가 오는 10월 상업 운전을 개시한다. 새울 1·2호기, 신한울 1·2호기에 이어 국내 다섯 번째 APR-1400이다.

울산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새울 3호기(오른쪽)와 4호기.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새울 3호기는 473개 계통, 총 300만여 개 설비로 돼 있다. 계통, 설비 하나하나가 만만찮은 공학 작품이다. ‘1차측기기 냉각수 열교환기’란 계통이 있다. 정전 등 돌발 상황이 생기면 냉각수 공급이 중단돼 멜트다운(노심용융) 같은 중대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이 계통에 외부 이동형 펌프 차량을 연결하는 기술적 이슈를 해결하는 데만 3년 이상이 걸렸다. 2020년 7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다. 한국수력원자력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과 질의서를 100번 가까이 주고받고, 이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검토해 ‘규격’을 확정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473개 계통 중 1개 계통을 변경하는 데 이런 지난한 절차가 필요했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생활 편의는 이렇게 엄격하게 규격을 준수한 기술에서 비롯된다. 기술의 기원은 수학, 그리고 연구실의 기초과학이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술의 산파가 있다. 규격과 표준이다. SMR도 각국에서 규격 논의가 2000년대 초부터 이뤄져 왔다. 산업과 시장이 열리기 수십 년에 앞서 과학계에선 규격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토론이 오간다.

한국이 세계적 경쟁력을 자랑하는 통신 기술에서도 표준이 알파와 오메가다. 6세대(6G) 이동통신 표준 주파수 대역을 어디로 정할지 국제적 논의가 한창이다. 6G 등 차세대 이동통신은 가정과 일부 공장에 머물러 있는 사물인터넷(IoT)을 광대역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플라잉카로 불리는 미래항공모빌리티(AAM), 자율주행차 등의 기초 인프라이기도 하다. 규격은 이처럼 세상을 진일보시키는 기저의 원동력이다.

사회로 눈을 돌려보면 자격이 그 역할을 한다. 특정한 지식 보유자에게 자격을 부여해 사회를 존립하고 발전시킨다. 사실 입시부터 학위 취득, 입사, 승진 등 살면서 마주치는 대부분 문제가 자격 취득과 관련이 있다. 최근 이슈인 의대 정원 확대도 그렇다. 최상위로 선호되는 자격을 갖춘 의사 직역이 자격 가치의 하락을 우려해 정부와 벌이는 싸움이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겐 걸맞은 권리를 주지 않는다. 이 법칙은 정치판에선 예외다. 이 시대 정치인의 자격은 선동과 편 가르기, 증오의 부추김이 된 것 같다. 궤변과 막말, 가짜뉴스 유포도 기본이다. 정치는 최상단에서 한 나라의 자원 배분을 결정한다. 우선순위와 경중에 따라 국가의 미래와 청년들의 앞날이 결정된다. 한때의 잘못된 자원 배분이 파멸적 재앙을 야기할 수도 있다.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탄소중립, AI 시대의 세계적 흐름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이 그런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수년의 세월이 걸렸다. 정치를 하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살피고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야가 공천한 후보자들을 살펴보면 이런 자격을 갖춘 사람이 드물다. 오히려 종북 좌파, 범죄자, 부동산 투기자, 전관예우·탈세 혐의자 같은 무자격자가 즐비하다. 규격에 맞지 않는 기술은 위험하다. 안전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과학적 숙의를 거쳐 배척된다. 마찬가지로 무자격자들이 설치는 나라도 위험하다. 현명한 국민들이 걸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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