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얻는 위민애군 리더십, 12척 남은 수군 재건 이끌다

2024. 3. 3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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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한의 ‘충무공 경영학’ ③
1597년(선조 30년) 9월 단 13척이 배로 133척의 왜선과 전투를 벌인 이순신 장군은 31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물러나게 했다. 사진은 이 같은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중앙포토]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구금됐다가 풀려난 뒤 백의종군 길을 걷던 이순신. 그는 어머니 초계 변씨가 83세의 병든 노구를 끌고 자신을 만나기 위해 상경하다가 선상에서 숨을 거둔 현실에 좌절해 목놓아 울었다. 1597년 4월 13일의 일이다. 모친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하던 이순신은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길을 떠났다.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칠천량해전 패전 이후부터 맨주먹으로 수군을 재건했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빈손으로 시작해 일본의 거대 수군을 물리친 충무공의 수군 경영학의 실체를 살펴보자.

이순신은 생애 두 번의 백의종군을 했다. 여기서 언급할 백의종군은 그 중 두 번째로, 53세 때(1597년)였다. 그는 선조의 몰이해와 일본군의 간계, 조정 일부 신료의 모함 등으로 의금부에 투옥되어 27일간의 옥살이 후 4월 1일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597년 4월 1일부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는 8월 3일까지의 약 4개월간이 백의종군 기간이다.

이순신은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전한 7월 15일부터 명량해전이 벌어진 9월 16일까지 두 달 동안의 짧은 기간에 조선 수군을 재건해냈다. 궤멸하고 흩어져 버린 조선 수군을 재편성해 최소한의 전투가 겨우 가능하도록 만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본 수군 지휘부에게는 조선 수군의 건재함을 증명한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 틀림없다.

임금·조정·백성 마음 얻은 완벽한 경영자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크게 패했다. 원균은 도주하던 중 전사했고 수군 대부분이 궤멸했다. 물자와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사실상 재건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선조는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으로 싸우라(命攻陸戰)’는 조서를 내린다. 제해권이 일본군에 넘어간 데다 1만 명이 넘는 병사와 100척 가량의 전선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조선 수군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이때 그 유명한 이순신의 명언이 등장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임진년 이후 적들이 감히 남쪽을 위협할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수군이 그 세력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폐지한다면, 적은 반드시 호남·호서를 거쳐 한강에 이를 것입니다. 다만 한순간에 질풍을 타게 되니 신은 이를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전선이 또한 12척이 있습니다. 신이 죽지 않는다면, 적 또한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今臣戰船 亦有十二 臣若不死 則賊亦不敢侮我矣). (최유해, 『(이충무공)행장』)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활약한 장수들 활약상 중에 이만큼 장렬하고 극적인 선언은 어디에도 없다. 뛰어난 리더, 탁월한 경영자는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건다. 국내외 지도자들과 명장들,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은 말 한마디로 대중을 웃고 울게 만든다. 이로써 대중과 병사들이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꾼다. 링컨이나 처칠,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도 말 한마디로 세상을 바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순신은 임금과 조정, 백성의 마음을 얻어낸 완벽한 경영자였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위해 경남 합천으로 향했던 ‘백의종군로’ 이정표. [사진 서울여해재단]
경영자는 24시간 깨어 있어야 한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기 전 백의종군길을 내려오던 이순신은 이미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한 갖은 방안을 골똘히 고민했을 것이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받은 이순신은 흩어진 수군과 의병들을 불러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생각하면서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전선(戰船) 확보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배설이 지휘하던 전선 12척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순신에게 최소한의 버틸 힘이 되었다.

일본 수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마음이 급한 그는 수군 전력을 정비하는 데 매진했다. 전라도로 서진하면서 수군을 정비했다. 이순신이 전라도 장흥에 들어간 8월 17일부터 사흘 정도의 행적을 보면 그의 수군 재건 움직임이 드러난다. 이순신은 16일 보성에 머물면서 굴암에 보성 군수와 군관을 보내 난을 피해 떠났던 관리들을 찾아내 행정 체계를 복원했다. 그리고 활 만드는 이를 만났다. 수군에게 활만큼 중요한 병기는 없으니 이를 채울 방법을 의논한 것이다. 17일에는 직접 장흥 땅으로 들어가 군량을 훔친 이들을 붙잡아 장을 쳤다. 8월 29일 이전까지 이순신은 신상필벌의 군기를 세우고 군량과 보급을 빼가려던 이들을 엄히 꾸짖고 매를 치며 흩어진 수군 병사들을 모아들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의 함대는 8월 29일 어란진을 떠나 진도 동편 벽파진으로 옮겨 갔다.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봤다. 진도 울돌목을 살필 수 있는 지역인데다 벽파정 옆 선황산에 연대(煙臺)가 있었기 때문이다. 울돌목은 서해와 남해의 물길이 드나드는 좁디좁은 길목 수로이다. 이곳을 탐망하고 있으면 서해로 넘어가려는 일본 수군의 동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연대는 해안가에 설치한 봉수대이다. 수군 CEO 이순신은 지리적 이점과 물길의 이점을 먼저 확보한 정보전의 대가였다. 반은 이겨놓은 전쟁이랄까.

최소 투자로 최고 결과 낼 수 있게 이끌어

진도 동북쪽에 자리한 정자 벽파정.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을 도운 향민들이 있던 자리다. [사진 서울여해재단]
그런 상황에서 배설 장군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우수영으로 가버렸고 아예 뭍으로 도망쳐버렸다. 기가 막힐 일이지만 이순신은 수군이 동요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는 것도 경영자가 택하는 한 방법이다. 이순신의 고뇌는 더욱 깊어졌다. 이때 며칠간 바람이 계속 불어 배들끼리 부딪쳐 깨질까 노심초사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순신은 살을 에는 찬 바람에 떨고 있는 수군 병사들을 염려했다. 9월 9일 중양절을 맞아 제주도서 보내준 소 다섯 마리를 잡아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장군의 위민애군 정신이 난중일기 곳곳에 이렇게 드러나 있다. 무릇 장수와 CEO라면 솔선수범이 으뜸이고 휘하의 스태프들을 세심히 살펴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치열한 전쟁과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이렇게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이순신은 명량해전 직전까지 13척의 판옥선과 1000여 명의 군사를 확보했다. 배설 장군이 가지고 도망친 12척에 반파된 한 척을 수리하여 13척의 전투선을 확보한 것이다. 판옥선 한 척에 125명 정도 타야 하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해 전선마다 80명~100명씩 13척에 탔을 것으로 낮춰 잡아 군사가 1000여 명일 것이라고 추산한 것이다. 그렇게 명량으로 들어올 적들에 대비하며 수군을 재건하고 적을 기다린 이순신이었다.

이를 기업경영에 적용해 보자.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고 사업의 성공을 전망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CEO는 다양한 정보를 종합하고 수학적·통계적 모형까지 고려해 최고경영자로서 의사결정을 내린다. 500년 전에 이런 용어나 개념이 있었을 리 없지만 이순신은 놀랍게도 이를 해냈다. 승리는커녕 싸움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상황 속에서도 앞을 내다보며 승리를 예측하고 이를 전술에 적용한 것이다. 기업경영자로서 충무공에 배워야 할 대목이다. 요약하면 이런 식으로 정리된다.

① 틀림없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② 최소한의 투자로 최고의 결과를 거머쥘 수 있게 준비하기

경영과학의 효용성은 “미래를 가장 정확히 예측하는 자가 모든 것을 갖는 것(Those who foresee the future most accurately will take it all)”이다. 이순신은 가장 불리한 전투를 앞두고 모든 지리와 수리 경영, 위험 요소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해 봤다. 이는 실제 전투에서 정확한 의사결정으로 이어졌다. 명량대첩의 서전이 밝아오고 있었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서울여해재단 이사장. 1990년 단 3명의 직원과 함께 화장품 제조업체 한국콜마를 창업해 연간 3조원 매출의 K뷰티 중추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난중일기’‘장계’ 등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의 한글 번역 사업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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