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게 쌓인 필선·연약한 종이… 숲이 되고 전설이 되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4. 3. 2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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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구, 종이와 흑연으로 일으킨 화면
종이·흑연 두 재료의 변주… 연필만으로 다양한 표현, 종이 덧대고 뭉쳐 입체화…
5월 개인전 '축성법' 종이로 만든 성벽, 설화 같은 이야기 속으로

◆흑연으로 그린 신비의 세계

새까맣게 반짝이는 어둠이 한편에 내려앉은 종이 위에서 임선구(33)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재료인 흑연은 신비로운 대지를 파헤쳐 강을 내듯 완강한 의지로서, 또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결을 좇듯 유연한 태도로서 화면을 채워 나간다. 흑연에 점토를 섞어 만든 심지를 기다란 나무 안에 품은 연필은 그리기의 기초 도구다. 그렇듯 겸허한 재료의 가능성을 시험하며 작가는 매번 다른 힘과 속도로, 매번 낯선 마음으로 종이 위에 흑연을 가라앉힌다.
임선구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2018). 임선구 제공
임선구는 자신의 작업이 종이와 흑연을 이용하여 “사적 경험과 공적 사건 간의 미묘한 관계를 엮어 다양한 층위의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두 재료를 꾸준히 사용하는 한편 표현에 있어 다각도의 변주를 선보여 왔다. 작품 활동 초기인 2018년의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연작은 자신의 유년기 기억과 구전 설화 등의 소재를 차용하여 서사적인 내용을 펼쳐 내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동시에 평면 위에 연필로 그림 그리는 힘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흑연이라는 재료로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흩어지고 날아가는 기억 파편들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흑연 입자들을 종이라는 연약한 바탕 위에 안착”시키는 일이다. 오일 파스텔 등 색채를 가진 재료를 화면에 접목하여 서로 다른 성질의 안료가 뒤섞이며 번지고 밀리는 흔적을 대비하기도 했다. 때로 화면 속 유기적으로 관계 맺는 도상들의 움직임은 영상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번안되었다.
임선구는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세마(SeMA)창고(2022), 드로잉룸(2022),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2019), 갤러리 조선(2019)에서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신한갤러리,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두산갤러리, 학고재, 드로잉룸, 공간서울 등에서 연 단체전에 참여했다. 인천아트플랫폼 14기(2023), 양주시립미술관 창작스튜디오 7기(2022) 레지던시에 입주해 작업했다. 올해에는 ‘2024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되어 오는 5월10일부터 6월16일까지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전시명을 ‘축성법(築城法)’이라고 짓고 ‘A Castle Built of Dust(캐슬 빌트 오브 더스트, 먼지로 세운 성)’이라는 영문 부제를 덧붙였다. “그간 흩어지고 사라지는 삶 주변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흑연이라는 물성으로 조율해왔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늘 밑바탕이 되어 왔던 종이가 전시 공간의 주인이 됩니다.”
인천아트플랫폼 스튜디오에 선 임선구 작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종이로 지은 성: 평면에서 입체로

흑연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임선구는 줄곧 종이를 회화의 지지체로 삼아 왔다. 캔버스 천에 비하여 가볍고 연약한 종이는 흑연 가루가 두껍게 발릴수록 젖은 듯 울기도 하고 종종 찢어지거나 구겨지기도 한다. 2022년 두산갤러리 서울에서 진행된 단체전에서는 그러한 종이의 속성을 숨기기보다 고스란히 드러내고자 나무 틀에 표구하지 않은 상태로 벽면에 길게 늘어뜨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종이의 본성을 내보이는 데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서 의도적으로 찢긴 종이를 콜라주 형식으로 덧대어 붙이는 표현을 시도하게 됐다. 작은 돌멩이 등의 오브제들을 끌어와 화면의 질감 및 높낮이를 다양화하는 실험 또한 병행했다.

같은 해 서울시립미술관 세마창고에서 열린 개인전 ‘보이지도 않는 꽃이: 발자국을 발굴하기’에서는 주로 평면 지지체로 여겨지는 종이를 입체적 요소로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본격화했다. 가상의 신화를 현실의 공간 속에 재연하듯 과감하게 찢어 붙인 종이로 거대한 부엉이와 나비, 전설 속 동물들, 그리고 그들이 서식하는 숲의 나무와 같은 형상을 만들어 냈다. 전시 공간 가운데 제단처럼 융기한 구조물을 설치하여 그것을 딛고 올라선 관객들로 하여금 주위를 다양한 높이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화면 속을 유영하던 신비한 도상들은 이제 화면 바깥의 세상에서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실체로서 현현한다.
임선구 개인전 ‘보이지도 않는 꽃이: 발자국을 발굴하기’(2022, 세마창고) 전시 전경. 양이언,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최근 임선구는 그간 쌓아 온 서사적 도상들을 화면 내에 간직하는 동시에 재료의 물성을 극대화하여 드러내는 실험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면모다. 그 시도의 일환으로서 직접 수제 종이를 제작하여 지지체로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근작 ‘벽장 안의 눈’(2023)이 대표적 사례다. 조각적 형태로 변모한 반(半)입체 화면은 역사 속에서 발굴된 유물의 생김새를 연상시킨다. 종이를 두껍게 쌓아 돌처럼 단단하게 굳혀서 틀을 마련하고 상단에 그물 모양으로 재단한 종이를 대어 상자와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종이 그물 안쪽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상자 내부 벽면에 부착한 흑연 그림들을 발견하게 된다. ‘벽장 안의 눈’이라는 작품명이 암시하듯, 어둠 속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지의 얼굴들이 바깥세상의 우리를 거꾸로 응시하는 모습이다.
(…) 출처가 다른 종이 잔해들은 결국 사라져버릴 어제의 시간처럼 부서졌다가 다시 경화되어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여전히 위태롭게 서로를 의지하는 종이 벽에는 날카로운 칼날에 잘게 찢긴 모서리 사이를 축축한 진흙으로 메우고, 수십 번 주물러 뭉그러진 덩어리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가 녹아 있다. 누군가에겐 소문이 되고, 다른 이에겐 사건이 되며 나와 타자 사이를 경유하던 이야기들은 이제 벽장 안으로 들어가 그곳이 자신의 무덤인 양 박제된다. - 성을 짓는 방법에 관하여, 임선구(2024)
임선구 ‘벽장 안의 눈’(2023). 임선구 제공
◆가장 연약한 것들로부터…

언젠가 임선구에게 무엇을 그리느냐고 묻자 “기억의 거름망에 걸러지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들”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종이에 흑연을 매장하듯 까맣게 몰아붙이는 과정 끝에 살아남은 몇몇이 그 세계의 주인이 됐다. 무척 내밀한 기억, 비밀스러운 상상에서 출발하여 지극히 주관적인 방식대로 자라나 온 그의 화면은 문자 그대로 조금 더 두텁고 묵직한 실체가 되어 간다.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재료를 매체 삼아 그것이 지닌 고유한 물성을 재차 탐구하며 끝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일구어내는 일이다.

다가오는 5월의 개인전에 관하여 그가 말하기를 “작업 안에서 시끄럽게 이야기했던 많은 이미지는 벽 뒤로 숨거나, 드로잉 북 안으로 들어가고 전면에 세워지는 성벽들로 그 내부의 서사들을 가늠해보는 전시가 될 것 같습니다. 종이뿐만 아니라 가벼운 물성을 가진 모든 재료를 뭉쳐 만든 벽들이 20점 내외로 디스플레이될 예정이에요. (…) 긁어모은 땅, 언덕들, 무너지는 산, 짐승과 새의 얼굴을 빌린 종이 드로잉들이 각각 ‘이야기 형태소’가 되어 벽장이라는 단어들을 만들고, 이제 이 울퉁불퉁한 종이 벽장의 외곽을 연결해 울타리와 벽이라는 문장으로 이어보려 합니다.”
왼쪽부터 임선구의 ‘긁어모은 땅’(2021) 연작과 ‘이상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2018), 두산갤러리 서울의 단체전 ‘두산아트랩 2022’ 전시 전경. 이의록, 두산갤러리 제공
연약한 필선이 짙게 쌓여 까마득한 산과 강을 이루고 가벼운 종이가 거듭 뭉쳐 굳건한 성벽이 된다. 구전된 이야기들, 전염된 소문들, 신비한 상상들을 묻어 둔 종이 위의 검은 대지가 삼차원 공간을 향하여 자신의 몸을 일으킨다. 겹겹이 축적되어 단단해진 몸으로 전시 공간 벽면에 걸린 임선구의 화면이 마치 그 자체로서 진실이 된 하나의 설화 같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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