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효성' 일군 섬유산업 거인 … 한미FTA 체결 이끌어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정상봉 기자(jung.sangbong@mk.co.kr) 2024. 3. 29.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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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래 효성 명예회장 별세
소탈 1976년 11월 효성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임직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

한국을 넘어 세계 섬유 산업을 이끈 큰 별이 졌다.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2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2017년 고령과 건강상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7년 만이다. 재계에 따르면 조 명예회장은 이날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효성그룹 창업주 고(故) 조홍제 회장의 장남인 조 명예회장은 1982년 효성그룹 회장에 취임해 2017년까지 35년간 효성을 이끌었다. 고인은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를 국내 독자 기술로 개발해 효성을 전 세계 스판덱스 1위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조 명예회장은 1935년 11월 19일 경남 함안에서 조홍제 창업주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군북국민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서울 종로구 가회동 재동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이곳에서 1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히비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 일본 와세다대 공대를 졸업한 조 명예회장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공대(IIT)에서 화학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박사 학위 과정을 준비하던 조 명예회장은 부친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 효성그룹의 전신인 동양나이론 설립에 뛰어들었다. 당시 조홍제 창업주는 기술로 나라를 세운다는 '산업보국'의 철학으로 동양나이론의 건립을 준비했다.

실 공장을 짓기 위해 화학을 전공한 아들의 조력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조홍제 창업주는 미국 유학 중인 아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조 명예회장은 당시 건설본부장을 맡아 동양나이론의 생산공장인 울산공장 건립을 주도하며 본격적으로 경영활동에 뛰어들었다.

기술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2004년 중국 저장성 자싱의 타이어코드 공장을 찾았다. 자싱은 조 명예회장이 역설한 '홍수론'에 따라 중국에 첫 생산 공장을 세운 곳이다.

오일쇼크 여파로 전 세계가 불황의 늪에 빠진 1982년 조 명예회장은 효성그룹 회장에 취임해 효성의 중흥을 이끌었다. 고인은 섬유, 중공업, 화학 등 핵심 사업을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개편하면서 사업 고도화를 추진했다. 고인은 평소 "누구도 가지 않을 길을 가라"고 강조하면서 불확실성과 불가능에 도전하며 핵심 산업 기술 국산화를 이뤄냈다. 대표 사례가 스판덱스 개발이다.

조 명예회장은 1990년 스판덱스 사업 진출을 결정하며 효성 섬유연구소 연구원들에게 '스판덱스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스판덱스 제조기술은 미국, 독일, 일본만이 보유하고 있었다. 기술 개발이 지지부진한 동안 효성 내부에서는 '돈만 낭비하는 사업'이라는 개발 반대 여론이 터져나왔다.

그럴 때마다 조 명예회장은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독려하며 사내 여론을 잠재웠다. '실패를 두려워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사업이며, 난관을 극복하고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효성인의 자세'라는 조 명예회장의 격려에 연구원들은 힘을 얻었다. 효성은 약 3년간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92년 세계에서 네 번째, 국내 최초로 스판덱스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현재 효성의 스판덱스 브랜드 '크레오라'는 독자기술 개발로 미국 듀폰의 '라이크라'를 제치고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국제 교류 2007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 후쿠다 야스오 당시 일본 총리와 한일 FTA 협상 재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효성

중국·베트남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을 이끈 것도 조 명예회장이다. 1993년 12월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 타결 당시 그는 "기업이 정부와 국가의 보호벽 안에서 안주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판단하고 중국을 글로벌 전초기지로 염두에 뒀다. 조 명예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효성은 1999년부터 세계 최대 섬유시장인 중국에 본격 진출했다.

당시 조 명예회장은 "내가 직접 홍수를 일으켜야겠다"는 일명 '홍수론'을 내세우며 중국에 대대적인 시설투자를 단행했다. 그 결과 효성은 중국 사업장을 중심으로 현지 시장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미국, 유럽 등으로 수출을 확대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대폭 늘렸다. 25개 현지 생산·판매 법인과 7000여 명의 임직원이 자리한 중국은 지금까지 효성의 명실상부한 글로벌 전초기지 역할을 맡고 있다.

이후 인건비 상승 등으로 중국의 경영 환경이 악화되자 조 명예회장은 베트남으로 눈을 돌렸다. 효성은 2007년 베트남 호찌민시 인근에 공장을 건립하며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제2의 글로벌 전초기지를 세웠다.

조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맡아왔다. 2007~2011년 제31·32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지냈고, 2008~2014년 한일경제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고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필요성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한미 FTA 체결 당시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 가입에 기여하는 한편, 대일 무역 역조 해소, 한일 간 대·중소기업의 상생협력, 한일경제공동체 추진 등 한국 경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앞장섰다.

유족으로는 부인 송광자 씨와 장남 조현준 효성 회장,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 삼남 조현상 부회장 등이 있다. 빈소는 30일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발인은 다음달 2일 오전 7시다. 영결식은 다음달 2일 오전 8시 마포 효성 본사에서 열릴 예정이다.

[정유정 기자 / 정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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