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정상엔 태극기가 꼭 있어야죠" 24년간 태극기 값만 430만 원

서현우 2024. 3. 29.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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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컬100] 북한산 백운대 태극기 24년간 교체한 정왕원씨

극한 산행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_ 편집자 주

"백운대에는 태극기가 있어야 합니다."

문득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이 생각났다. 저주에 걸린 선원들이 "플라잉 더치맨에는 선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홀린 듯 되풀이하는 장면이다. 정왕원(74)씨도 영화 속 캐릭터처럼 홀린 듯이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북한산 백운대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닌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고.

왜 북한산 백운대에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사실 태극기가 게양된 봉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조금 얘기가 다르다. 과거 20세기에는 설악산 대청봉 같은 곳에 태극기가 걸려 있곤 했지만 지금은 싹 밀어냈다. 지난 2015년에는 정상부 관리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정상석은 자연석을 활용할 것, 주변부 경관이 난잡하면 자연경관에 어울리게 정비할 것 등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운대에 들어선 태극기는 이질적이다. 국립공원의 경우, 그것도 가장 상징적인 공간인 정상에 정상석을 제외한 인공시설물이 존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이 태극기가 들어선 사연을 알고 나면 더 놀랍다. 이 태극기는 국립공원공단이 설치,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의 일반인이 한다.

그게 바로 정왕원씨다.

백운대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는 정왕원씨.
정왕원씨는 태극기를 고이 접은 후 손수건으로 한 번 더 싸맨 뒤 지니고 다닌다.

손수건으로 꼭 감싼 태극기

정씨는 지난 2000년부터 백운대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현재는 개인택시 일을 하고 있는데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날이면 늘 백운대에 올라서 태극기 상태를 점검한다. 색이 바래거나 해진 부분이 있으면 즉각 새 걸로 교체한다. 교체주기는 날씨에 따라서 상이한데 보통 한 달에 3번 정도 바꾼다.

"작년 말 기준으로 백운대를 2,200번 올랐어요. 태극기 교체 횟수는 딱히 세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한 달 평균 3장이니 1년이면 36장이군요. 24년 했으니 계산하면 한 850장 정도 구매했던 거네요. 태극기 한 장 소매가격이 1만2,000원이지만 저는 도매가격으로 5,000원 정도에 사고 있거든요? 태극기에만 430만 원이나 썼네요. 허 참 그렇게 많은 돈을 들였을 줄이야."

인터뷰 당일 북한산 진달래 능선에서 만난 정왕원씨는 스스로 계산을 해보곤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새벽 일찍부터 도선사에서 출발해 백운대에 오른 뒤 진달래 능선 쪽으로 걸어온 상태였다. 분명 본인이 늦을 테니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부리나케 백련사 기점에서 올라가 만난 그는 한참을 기다린 눈치였다.

"혹시 먼저 태극기를 좀 같이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요?"

사진기자의 말에 그는 배낭에서 태극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인상적이게도 그는 고이 접은 태극기를 고급 손수건으로 폭 싸서 갖고 다녔다. 배낭 안에도 독립된 주머니에 홀로 넣어놔서 다른 물건에 짓눌리지 않게 해놓았다.

"태극기를 늘 이렇게 싸서 갖고 다니시는 거예요?"

"당연하죠. 어떻게 태극기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어요."

백운대 정상석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선 정왕원씨.

고단한 삶을 비춘 빛, 백운대

정왕원씨가 백운대 태극기를 관리하게 된 건 그의 인생 궤적과 맞닿아 있다. 그의 인생사는 지난 2016년 본지 기사에 자세하게 소개된 바 있다. 그에게 "해당 기사에 나온 내용 중에서 정정할 부분이나 추가할 부분이 있냐"고 묻자 그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라 다시 얘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제 인생은 바닥을 기었고 비참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벌였던 사업들도 제대로 굴리지 못했어요. 여러 직업과 지역을 전전했지만 정착하지 못했죠. 2000년에 개인택시 일을 시작하면서 현상유지가 되는 삶을 살게 됐고요.

물론 사람들이 옛날 그 기사를 보곤 '그렇게 힘들게 살았으면서도 백운대 태극기 교체라는 좋은 일을 해서 존경스럽다'고 박수 쳐주곤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지만 저는 그냥 바닥에서부터 치열하게 기어올라 살아났을 뿐이거든요. 그런 얘길 들을 때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네요."

등산을 시작하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1994년, 일정한 직업이 없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대동문을 통해 백운대에 올라갔다. 애초에 백운대를 오르겠단 생각도 딱히 없었다. 그냥 산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가게 됐다. 헐렁한 작업복 차림으로 정상에 서니 그는 "경치가 완전히 딴 세상이라 충격이었다"고 했다. 그리곤 이내 시선은 정상에 있는 사람들에 머물렀다.

"정상에서 놀고, 쉬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나는 잘 놀지도 못하고 힘들게 사는데 이렇게 좋은 경치를 보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죠."

정왕원씨는 2000년도부터 개인택시를 운행하고 있다.

그 기억을 잊지 못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짬을 내 백운대를 찾았다. 일요일 아침 8시쯤 백운대에 도착하면 늘 보던 얼굴들이 있었다. 서로 가져온 음식과 다양한 술을 나눠 먹으며 즐기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딱히 정확히 몇 시에 모이자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게 2년이나 지속됐다. 그러면서 백운대 아래에서 기념품을 팔고 사진을 찍어 주던 박현우씨와도 자연스럽게 연을 맺게 됐다.

"그분 얘기론 자신이 1985년부터 직접 정상에 대나무로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장사도 점점 안 되고 무릎도 아프니 백운대에 매일 올라오기 어렵게 됐죠. 그게 2000년입니다. 그때 제가 마침 개인택시를 시작하면서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스케줄이 됐어요. 그래서 제가 태극기 일을 자연스럽게 인계받았죠. 박씨와는 지금도 연락해요. 늘 '태극기 잘 있냐'고 물어봐요."

24년간 3일에 한 번 등산…

그래서 3일에 한 번꼴로, 1년에 약 100회씩 그렇게 백운대를 집요하게 올랐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냐'는 말이 있듯 "어떻게 같은 산만 오르고 사냐?"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의 백운대 사랑은 끔찍하다. 설악산 대청봉도 가봤고, 지리산 천왕봉도 올랐지만 그저 땀이 좀더 날 뿐이었단다. 그 어느 곳도 백운대만큼 좋지 않았다. 그는 "백운대 정상 암릉 구간이 엄청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데 다른 산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물론 설악산도 지리산도 좋죠. 하지만 저는 돈과 시간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감안하면 서울 바로 옆에 딱 붙어 있는 백운대가 얼마나 좋아요. 게다가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계단과 난간도 잘 만들어놨죠. 사실 북한산 백운대 정상부만 놓고 보면 무척 어렵고 무서운 산입니다. 얼씬도 못 하겠죠. 돈과 시간을 적게 들여, 안전하게, 스릴을 즐기며, 오를 수 있는 어려운 산이라니. 이런 산이 옆에 있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죠."

정씨가 백운대를 올랐던 나날을 말로 되짚어 오른다. 왜인지 모르게 그 모습에서 그의 인생사가 겹쳐 보였다. 그는 순조롭게 자리를 잡을 만하면, 일이 풀릴 만하면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곤 했다. 마치 9부 능선인 백운봉 암문까지는 순조롭게 오르지만 생각보다 무서운 백운대 정상부를 극복하지 못하는 산행 초보처럼.

하지만 정씨는 백운대 정상을 올랐고, 악착같이 버티는 데 급급했던 인생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니 그에게 백운대는 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진달래능선에서 만난 정왕원씨. 그는 새벽 일찍 등산을 시작한다.

2000년대 초 기존에 있던 깃대가 삭아서 부러진 적이 있었다. 4m 높이에서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던 태극기가 반절쯤 내려오니 영 볼품이 없었다. 4~5m 쇠파이프를 지고 백운대를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기회를 엿보는 사이 국립공원공단에서 깃대를 새 걸로 바꿔줬다. 정씨는 "아 이제 공단이 관리하려나보다 했는데 깃대만 바꾸고 태극기는 건들지도 않았다"며 "그래서 그때부터 쭉 내가 태극기 교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그래도 10번 중 1번꼴로 공단 직원이 가서 태극기를 교체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용케 공단이 깃대를 바꿔줬네요? 보통 자연물만 남기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금도 태극기 교체하는 일에 뿌듯함을 느껴요. 예를 하나 들게요. 백운대 정상에는 한국산악회가 1975년에 세운 통일서원비가 있어요. 옛날엔 그게 정상석 노릇을 했죠. 그런데 한 산꾼이 보니 거기에 백운대 이름도, 높이 표시도 안 돼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안타까우니까 자기가 그 비석 사이즈에 딱 맞는 종이에 백운대 이름과 높이 836m를 인쇄해서 뒷면에 붙여놨어요. 공단 직원이 바로 '이거 왜 네 맘대로 붙여' 하면서 뗐죠. 이 사람이 화가 나서 1년 넘게 계속 붙였고, 공단은 계속 떼는 싸움을 했어요. 아무리 그분이 '정상석엔 산의 이름과 높이가 적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씨도 안 먹혔죠.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공단이 사람을 시켜서 지금 정상석에 석각을 새기더라고요. 2000년대 후반이었어요."

"근데 그 사건과 태극기가 무슨 상관이죠?"

"그러니까 박현우씨와 제가 계속 태극기를 게양하는 작업을 이어오지 않았다면, 나중에 태극기를 매달았다면, 지금처럼 태극기가 백운대의 상징이 되지 못했을 거란 말입니다. 박현우씨가 일찌감치 잘한 셈이죠."

하산한 정왕원씨. 온도계를 늘 패용하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깊다.

어려운 살림에도 태극기 교체 도맡아

처음에는 태극기 값이 좀 부담됐다. 당시 기준으로 1만2,000원. 택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여윳돈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자체를 찾아서 협찬을 좀 해달라고 했다. 그는 "첫 해에 10장 주고, 그 다음해에 한 장을 주겠다기에 그럴 바엔 그냥 안 받겠다고 하고 나왔었다"며 "사실 나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게 백운대 정상은 행정주소가 고양시인데 강북구청을 찾아가서 달라고 했다"며 웃었다. 어쨌든 처음에는 그 정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지금은 어때요? 국립공원공단이나 지자체에서 지원해 주겠다는 얘기가 없나요?"

"그런 얘기도 없고, 제가 받을 생각도 절대, 전혀 없어요. 제가 이 일을 더 못 하는 날까지는 무조건 제 돈으로 할 겁니다. 백운대를 위해서 돈을 쓰는 건데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더 선뜻 쓰고 싶어요."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쓰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 그래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단순히 "좋아서"라고 했다. 누가 등을 떠밀지도 않았고, 노고를 칭찬받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단순히 좋아서란 말로는 부족해 보여 조금 더 캐물어봤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연다.

태극기를 든 정왕원씨. 인터뷰 당일에는 태극기가 아직 크게 훼손되지 않아 교체하지 않았다고 했다.

"백운대 정상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옵니다. 열이면 열, 태극기를 옆에 두고 사진을 찍어요. 그런걸 보면 우리는 다 똑같다, 모든 한국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 똑같다고 느껴요. 그러니 그렇게 태극기를 좋아해 주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일원들이 수도 서울 최고봉에 모였을 때 서로 같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상징물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어찌 안 '좋을' 수 있겠어요?"

백운대 태극기 앞에서는 좌파도 우파도, 여자와 남자도,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도 다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같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정씨는 그런 모습을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그랬다. 24년 동안 백운대를 올라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에 대해 좋다 싫다 일언반구도 없다가 딱 한 마디만 남겼단다. "여보, 의미 있는 일 한다"고.

백운대 오르려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백운대를 위해서 삶의 패턴도 바꿨다. 오후 6시 30분에 잠들어서 새벽 2~3시 사이에 깬다. 산에 가는 날만 그러는 게 아니다. 매일이다. 과거에는 친구들을 만나 술도 많이 마셨고 밤늦게 놀기도 했다. 하지만 오로지 백운대에 올라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그런 즐거움을 포기했다.

"일을 하는 날에는 새벽 3시쯤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출근합니다. 집 안에 철봉도 들여놨고 35kg 쇳덩어리도 있어요. 헬스를 하죠. 그리고 저녁 6시에 퇴근하면 곧장 잠들어요. 산에 가는 날이면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새벽 3시 내외에 도선사 들머리에 도착하고요."

"왜 그렇게 일찍 오르시는 겁니까?"

"거창한 이유는 아니에요. 예전엔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도선사 주차장에 주차난이 생겼어요. 주말이면 새벽에도 자리가 한두 개밖에 없을 때가 많아졌죠. 그래서 그냥 삶을 산에 맞췄어요. 주차도 편리하고, 올랐을 때 정상부에 사람이 없어서 교체 작업하기도 편하고, 또 아침 일찍 오신 분들도 헌 태극기가 아니라 새 태극기를 볼 수 있고 여러모로 좋더라고요."

"하지만 친구 만날 시간이 없는데요?"

"나이 70이 넘어가니까 누굴 만나서 술 마시고 그래봤자 맨날 쓸데없는 얘기만 하지 영양가가 없더라고요. 차라리 산에 가서 땀이라도 흘리면 다리 힘이라도 생기죠."

그러니 밤이 없는 삶을 선택한 건 그에게 대승적인 결정이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건사고도 많았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어느 겨울 가파른 나무계단 초입에서 살얼음을 못 보고 밟았다가 머리부터 떨어졌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 쇠기둥에 머리를 박으면서 추락이 멈췄다. 모자를 벗으니 피가 쏟아졌다. 묘하게 피를 한 번 흘리고 나니 정신은 말짱하고 그리 아프지도 않았다. 눈으로 피를 덮고 오기가 생겨 정상에 무사히 갔다가 내려 왔다. 피가 더 안 나기에 멀쩡한 느낌이었는데 병원에 가니 상처를 봉합해야 한다고 해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뇌진탕 증세까지는 없어서 더 위독해지진 않았다.

인터뷰 중 정왕원씨가 미소를 짓고 있다.

태극기 교체, 앞으로 3년 남았다

진달래 능선을 오르내리는 그의 숨이 사뭇 거칠다. 사실 이제 그의 백운대 사랑도, 태극기 작업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정씨는 "앞으로 3년, 길어야 5년 정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체력적으로 버겁다. 사실 가려면 갈 순 있는데 컨디션이 안 좋으면 선뜻 올라갈 결심이 잘 서지 않는단다. 그래서 도선사 주차장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도 한다.

"이어 받을 사람은 있나요?"

"없습니다. 백운대를 정말 사랑하고, 저처럼 백운대를 3일에 한 번꼴로 올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국립공원공단에 말해 보려고 합니다."

"국립공원공단이 할까요?"

"싫어도 할 수밖에 없죠. 깃대가 세워져 있는 걸요. 지금도 태극기가 해져 있으면 바로 공단 사무소에 민원이 접수됩니다. 그 등쌀에 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믿고 있어요."

"태극기 교체 일을 그만둔 뒤에는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가요?"

"사실 꿈이 있어요.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대서양까지 유라시아 횡단을 해보려고 합니다. 캠핑카로요. 그간 못 둘러본 세상을 실컷 보고 싶습니다."

그는 백운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꿈은 일절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백운대를 오르기 전 그의 세상이 주먹 안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면 지금은 팔을 활짝 벌려도 모자랄 정도로 세상이 넓어졌다고 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세상이 이토록 넓고 아름답다는 것도 모두 백운대에서 배웠다. 그래서 그는 "백운대는 내 인생의 스승"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든지 그런 게 있을까요?"

그는 망설였다. 그리곤 "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말을 하겠냐"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질문을 살짝 바꿔봤다.

"백운대에 처음 올라온 아이가 '여기 이 태극기는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 주실 것 같으세요?"

그는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에 꼭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답할 겁니다. 백운대에는 태극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는 백운대 위에 다른 그 무엇도 아닌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것이 곧 대한민국과 서울, 그리고 한국인을 드러내는 상징이자 의미라면서.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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