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쌓아 올린 대북제재, 中·러 비호 속 완전히 무너지나
北 핵개발에 잘못된 신호 줄 우려
한·미·일 독자 제재만으론 한계 있어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의 활동이 종료된 건 북핵 외교에 있어 일대 사건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핵폭주 속 제재 위반 사항을 상시 감독하고 고발할 기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넘어 국제사회가 지난 20년 동안 무수히 많은 협의를 거쳐 쌓아온 대북제재 레짐(regime) 자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명징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황준국 주유엔대사는 이를 “범죄를 저지르는 상황에서 CCTV를 파손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에 대응해 만들어진 전문가 패널은 한국·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8국에서 파견된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매년 두 차례 북한의 제재 위반 활동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위원회에 제출하는데, 국제적 공신력이 크기 때문에 여기에 제재 위반 사항을 하나라도 더 넣으려는 한국과 하나라도 더 빼려는 북한의 물밑 외교전이 치열했다. 2019년 3월엔 이 전문가 패널 보고서에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은과 메르세데즈 벤츠 리무진에 동승한 사진이 실려 국내외에서 화제가 됐다. 전직 외교부 간부는 “유엔 내에서 보기 드물게 회원국들 간에 만장일치의 공감대가 있어 운영되던 기구인데 사라지게 됐다”고 평가했다.
미·중 패권 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정세가 양극화하면서 대북 제재의 실효성이 약해진지는 이미 오래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6일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공공연하게 에너지 자원을 밀매하고 있는 실상을 보도하며 “유엔 대북제재 레짐이 거의 붕괴(collapse)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이번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 결의안 표결에서는 기권했지만, 최근 몇년 동안 안보리 이사국으로 각종 규탄·제재 논의에 거부권을 행사해왔다. 특히 2022년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포함 70차례가 넘게 미사일 도발을 했지만 “북한의 정당한 우려를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를 반복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2006~2017년 통과된 10개의 대북제재 결의안에 모두 찬성을 했었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 이런 표변이 더 뼈아팠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한·미, 한·미·일이 북핵에 연루된 개인·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독자 제재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유엔 안보리가 사실상 식물화된 가운데,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는 가상화폐 해킹 등을 차단해 북한의 핵폭주에 일정 부분 제동을 걸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의 활동이 없는 상태에서 ‘한·미·일 3국 만의 제재가 얼마나 효과적일 것인가’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대북제재를 모범적으로 준수해온 캐나다·호주, 북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상당수 국가들이 더 이상 제재를 준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의 핵무력 증강에 잘못된 그린라이트(허용 신호)를 주게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김정은 입장에선 촘촘했던 대북제재 감시망에서 벗어나 숨통이 트일 수 있게 된다.
이미 각국에선 이번 사태와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백악관은 28일 러시아를 향해 “북한과의 타락한 거래를 덮으려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비판했다. 일본 외교부도 성명을 통해 “유엔과 다자주의(多者主義)를 무시하는 처사”라며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의 책임에도 반하는 일”이라고 했다. 미국 보수 진영에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유엔 무용론’을 제기하며 미국이 내는 분담금 자체를 줄이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매튜 밀러 국무부 대변인은 “패널 활동이 종료되더라도 안보리 대북 제재는 유효하다”며 “미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과 관한 정보를 다른 회원국들과 공유하며 대북 제재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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