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도서’ 공격에 맞서 더 다양하게 더 빨간책 [책&생각]

한겨레 2024. 3. 2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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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어린이책’ 3호 이달 출간
지난해 도서 중 주체·연대
다양성·표현력 등 10개 부문
85권 ‘발굴’ 추천…기준 제시
“청소년 당사자 목소리도 담아”
성평등, 다양성의 가치가 실린 어린이·청소년 도서를 ‘불순 불온’ 서적으로 배척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비영리단체 ‘다움북클럽’이 발간 중인 ‘오늘의 어린이책’ 속 추천 도서도 줄곧 공격 대상이다. 지난 21일 발표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가운데 토니 모리슨 공로상은 미국도서관협회에 주어졌다. 성소수자 문학 도서 등을 금지하려는 퇴행적·반자유적 외부 공격에 맞서온 데 대한 평가였다. ‘오늘의 어린이책’ 그 세번째 목록과 과정을 공개한다. 편집자주
다음달 초부터 판매되는 ‘오늘의 어린이책 3’의 표지. 다움북클럽 지음 l 오늘나다움 l 1만8000원

‘오늘의 어린이책’ 3호가 이달 말 출간된다. 2023년 출간된 도서를 중심으로 주체성, 몸의 이해, 일의 세계, 가족, 사회적 약자, 표현, 젠더 다양성, 사회적 인정, 안전, 연대라는 열 가지 주제 아래 85권의 ‘성평등 어린이·청소년책’을 발굴, 선별해 의미를 살폈다. 이를 진행해 온 ‘다움북클럽’은 평론가, 편집자, 출판 기획자, 교사, 작가 등 어린이책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한 모임이다. 과거 정부가 관여한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 종료 후에도 독립적으로 지속 중이다.

지난해 일부 보수‧학부모 단체들은 공공도서관에 ‘2022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성평등’, ‘섹슈얼리티’ 등의 용어가 배제됐으니 그러한 주제를 담고 있는 도서는 유해하다’라는 논리로 성교육‧성평등 도서를 열람 제한 및 폐기하라는 민원을 쏟아부었다. 2023년 7월 김태흠 충남도지사가 도의회에서 ‘나다움책’ 7종 도서를 도서관에서 열람 제한했다고 밝혔고, 올 2월에는 경기도교육청이 학교도서관에 성교육도서 중 폐기 처리된 도서 집계 목록을 제출하라는 공문을 일선 학교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성교육 도서 검열과 다름없는 행위다.

다움북클럽은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인 반대와 검열에 맞서 ‘오늘의 어린이책 3’의 주제를 ‘당사자’로 정했다.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보라색 바탕에 젠더 다양성을 나타내는 무지갯빛 옷을 입은 이번 호에서는 청소년의 목소리도 실렸다. 성평등·다양성에 관한 ‘당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하기 위함이다.

2021년 9월, 2023년 3월 각기 발간된 1·2호와 달리 3호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범주 개정이다. 도서 추천의 기준이 되는 열 가지 범주 중 ‘혐오 반대’를 ‘젠더 다양성’으로 개정하였다.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 2년, 다움북클럽 ‘오늘의 어린이책’ 1·2권을 거쳐 다섯 번째 목록을 준비하며 이제는 성소수자 혐오 기류에 대한 저항을 넘어 다채로운 존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담고 긍정하기로 뜻을 모았다. 세계 유수의 교육 단체, 서점, 언론사 등에서 발표하는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LGBTQ+ 도서 추천 목록’처럼 우리에게도 젠더 다양성 어린이·청소년 책 목록이 생긴 것이다.

‘젠더 다양성’ 범주에서는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가진 존재들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과 성소수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는 정확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이는 성소수자 당사자인 어린이·청소년에게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안전한 거울이 되어 주고, 모든 어린이·청소년에게는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열린 창 역할을 할 것이다.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몸의 이해’ 부문에서는 스스로 자기 몸을 지키고 관리하는 방법을 다양한 시각으로 안내한다. 특히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에서 펴낸 청소년 성교육 도서 ‘청소년이 성을 알면 달라지는 것들’(김경아 지음, IVP)은 금욕주의적 시각이 아닌, 청소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시선이 눈에 띈다. 성교육의 주요 이슈를 꼼꼼히 다루면서도 기독교적 성인지 감수성의 새롭고도 성숙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보여 주는 시선도 돋보였다. ‘네가 오는 날’(돌로레스 브라운 글, 레자 달반드 그림, 정화진 옮김, 창비교육)은 입양 가족의 처음 만난 순간을 추억하며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암사자가 이끄는 모계 중심 사회에서 양육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나는 사자’(경혜원 글·그림, 비룡소), 암컷 홀로 유전자를 복제해서 새끼를 낳는 코모도왕도마뱀을 통해 한부모 가정 이야기를 다룬 ‘코모도 코코의 특별한 생일’(민아원 글·그림, 봄봄출판사)은 생물학적 사실을 통해 가족의 다양성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보여 준다.

‘사회적 약자’를 다룬 주제의 책들은 장애인, 유색 인종, 반려동물 등 당사자인 주인공들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화두를 연결하고 고민하도록 이끈다. ‘더 이상의 ‘안 돼’는 거절하겠어!’(메리앤 코카-레플러 글, 비비안 밀덴버거 그림, 김여진 옮김, 웃는돌고래)는 장애 인권 운동으로 미국 재활법을 통과시킨 주디스 휴먼의 이야기로 지금 우리 사회의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아래층 소녀의 비밀 직업’(스테이시 리 글, 부희령 옮김, 우리학교)은 유색 인종 여성이 겪는 차별을 보여 줌으로써 독자가 정치 문제를 인식할 기회를 제공한다.

‘젠더 다양성’에서는 다양한 젠더 정체성을 가진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고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거두게 한다. 결혼식에 신랑 없이 두 신부만 등장하는 ‘결혼식에 간 훌리안’(제시카 러브 글·그림, 신형건 옮김, 보물창고)은 어린이에게 트랜스젠더에 대해 알리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드러난다. ‘할아버지가 사랑한 무지개’(해리 우드게이트 글·그림, 김다현 옮김, 쥬쥬베북스)는 무지개 축제를 어린이의 눈으로 그리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랑하고 존중받는 세계를 보여 준다. 두 책 모두 성별이 어느 것도 제한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위 책들을 포함한 85권의 ‘성평등 어린이·청소년책’ 도서는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를 열어 주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서로에게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꽃피우게 도우리라 믿는다.

우리나라는 성교육 표준 교육과정이 사실상 전무하다. 공교육에서 기대할 수 없는 성교육을 질 높은 단행본을 통해 어린이‧청소년 당사자 스스로가 학습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공공도서관에 성과 관련된 도서를 그저 ‘음란하다’며 제한하려는 이들의 의도와 목적에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책의 주인은 어린이다. 좋은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로부터 찾은 다양성을 어린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 쓰인 책이다. 자신을 긍정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다양성 안에서 이해와 공감, 위로를 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삶에서 직접적 충족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책이 존재한다. 이 변치 않는 사실을 바탕으로 다움북클럽과 어린이를 사랑하는 이들은 정당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 글은 김다노 어린이책 작가(맨 왼쪽부터), 서현주 전 초등교사(성교육 활동가), 유지현 기획자(책방사춘기 대표), 윤아름 초등교사(전교조 성평등특별위원장)가 공동 집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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