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몸과 그런 몸들이 오는 책방 [책&생각]

한겨레 2024. 3. 2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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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책방은요 │ 비건책방
비건책방 내부 사진.

2022년 2월1일 음력 설이자 ‘신구간'의 마지막 날, 나는 제주에 이주해 있던 몇몇 벗들과 함께 제주 동쪽의 선흘리에서 이사떡을 돌리고 있었다. 이번 달 말에 선흘초등학교 앞에 책방이 생긴다고 놀러 오시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무심히 한 입 베어 물던 삼춘(제주에서 이웃어른을 칭하는 말)들은 맛있다고 하나씩 더 받기도 했다. 찹쌀과 제주 팥을 듬뿍 넣어서 떡집에서 맞췄으니 맛있을 수밖에.

2020년부터 ‘비건책방’이라는 이름으로 비건과 책을 연결하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서울에서 했는데 책방 공간 자체는 2022년 2월22일에 제주 동쪽 선흘리에서 정식 운영을 시작했다. 2월이 되자마자 이사떡을 먼저 돌리고 임시 운영부터 시작한 이유는 신구간 기간에 이사하는 게 좋다는 동네 삼춘들의 말을 따라서였다. 제주에는 일 년에 한 번씩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기 전 일주일 정도 지상에 있던 모든 신이 부재하는 기간이 있다. 그걸 ‘신구간'이라고 부른다는 걸 제주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지상에 내려와 있던 모든 신이 새로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옥황상제를 만나러 가는 신구간 기간에 지상의 인간들은 이사, 집 고치기, 나무 베기 등 신의 허락이 필요한 조심스러운 일들을 했다고 한다. 그래야 ‘동티’(금기를 범한 데 따르는 재앙)가 안 난다는 것이다. 신들 역시 업무 재배치와 순환 보직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꽤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정말 싫은 업무를 맡았다고 하더라도 일 년만 버티면 된다니 ‘제주의 토속신’들이야말로 최고의 직장 아닌가) 나는 비건책방이 책방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 잘 어우러지길 바랐고, 무엇보다도 책방을 하려면 ‘하늘의 행운'이 필요할 거 같아서 신구간 기간에 대해 알자마자 떡을 준비했다.

비건책방 북토크.

책과 가구를 아직 다 들여놓지 못한 임시 운영 기간에도 틈틈이 책은 판매되었다. 임시 운영 첫날 판매된 책들은 ‘아무튼, 비건’ ‘좋은 생명체로 산다는 것은’ ‘제주도에 간 전설의 고양이 탐정 1, 2’ ‘여기서 Here’ ‘다시 봄 그리고 벤’이었다. 대표적인 비건 입문서와 동물생태학자의 책에서부터 어린이 추리물과 그래픽노블, 독립출판물까지 다양한 책이었는데, 내가 야심 차게 진열해놓은 비건 신간 큐레이션들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입고한 책들을 아직 진열도 제대로 못하고 쌓아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쏙쏙 사람들은 잘도 빼 왔다. 오신 분들의 나이도 어린이에서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했는데 이러한 흐름은 마치 운명처럼 쭉 이어져 오고 있다. 처음 문을 열고 나서 생각보다 동네 분들이 많이 오셔서 반가웠는데(동네 삼촌들은 풀빵을 팔라고 여러 차례 말하셨지만 내가 책만 판다고 해서 이미 크게 한 차례 실망하셨다), 오랫동안 비어있는 마을 한복판의 조그마한 바깥채 창고를 누군가 일년 넘게 고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고쳤나 궁금하기도 궁금하셨던 것 같다. 기간이 길어진 건 무언가를 많이 고쳐서가 아니라, 돈과 시간이 생길 때마다 틈틈이 수제작으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여서 실제로 와서 둘러보고 나서는 물음표 찍힌 얼굴로 돌아보곤 하셨다. 그러면 나는 햇빛이 잘 드는 통창 앞의 벤치를 빼어드리곤 했다.

비건책방 외부 모습.

책방을 열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세 가지였다. 책방 이름이 왜 비건인가, 이런 조용한 마을 한복판에 왜 책방이 있는가, 비건이 아니어도 와도 되는가. 사실 답변은 너무 간단한 거라서 나는 뭔가 사연 있는 긴 서사를 가열차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었다. “책방 사장이 몇 년 전부터 비건이 되었고, 오랫동안 ‘책’ 덕후입니다, 이 마을은 2019년에 다른 프로젝트 때문에 몇 달간 계속 왔다갔다 하다가 그냥 여기서 책 읽고 글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어떤 날에는 비건일거에요, 오세요.”

나는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간이 가진 애초의 설계를 믿는 편이다. 타인은 지옥이고 우리는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한 사람을 안다는 건 지옥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절멸하지 않은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복보다 고통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 그 능력은 우리를 ‘연민’과 ‘연대’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다 보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점점 더 확장된다.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내가 고통스러운 것이 견디기 힘들어서 함께 옆에 있어 주고 싶거나 싸우고 싶어지는 순간이 많아진다.

비건책방에 대한 한 줄 소개로 늘 하는 말이 있다.“‘삶의 태도로서의 비건’을 지향하며, 다양한 비건책을 발굴하고 소개합니다.” 비건적 삶이란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내 몸으로 받아들여서 감당하는 것이다. 비건책방은 바로 그 몸 자체이고 그런 몸들이 ‘비건책’을 만나기 위해 오는 공간이기도 하다.

비건책방 내부 사진.
비건책방 단골 고객들이 책을 둘러보고 있다.

물론 틈틈이 동네 삼촌이 길에 떨어뜨린 무를 찾아서 갖다 드리기도 하고, 동네 삼촌들이 그림 선생님과 그린 그림들이 엽서로 나오면 그 엽서를 벽에 붙여서 전시하기도 하고, 어린이들의 가방을 잠시 맡아주기도 한다.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이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었는데 비건책방에 있어서 바로 사서 갔다는 후기 글을 읽으며 (책 ‘님 침스키’) 남몰래 ‘좋아요’를 누르고 (좋아하는 책이라서 팔긴 싫어서 안보이게 숨겨 놨는데 어찌 찾으신건가요), 비건책방에만 입고된 책을 사러 일부러 제주 남쪽에서 왔다는 분을 만나서 손을 맞잡으며 기뻐하기도 하고 (책 ‘37년생 홍태옥’ ,‘우리집 고양이를 위한 식물 보고서’) 제주 농부들과 땅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제주 로컬 푸드 연구회’에 가입해서 공부도 하면서 책방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비건책방을 10년은 해보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비건책방은 모든 일이 물처럼 흘러왔다. 책방 하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랴 다사다난한 책방주인을 여러모로 도와주고 있는 책방지기들(비건 청년 책방지기, 할머니 책방지기 등) 역시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만났다. 비건책, 비건인간, 비건공간이 물처럼 공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기를 바라고 비건책방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빛나는 한 장면을 만들어주거나 반려책을 찾는 데 한 줄의 도움이 된다면 두고두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비건책방은 내 앞의 어떤 한 사람, 지금 이 한 권의 책에 집중하는 하루를 쌓아가면서 느슨하고 치열하게 책과 사람들을 만나야 될 것 같다.

글·사진 김문경 비건책방 대표

비건책방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흘동2길 46
instagram.com/veganboo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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