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봄날 강가에서

관리자 2024. 3. 2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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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섬진강에 머물기로 했다.

거의 매일 강으로 나가 개들과 함께 습지를 산책 삼아 돌아다니지만, 그것과는 다른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섬진강이 마르지 않는 한,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논농사를 못 지은 적은 없다고, 평생 들녘을 지킨 농부들이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2020년 여름, 남원과 곡성과 구례가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은 후부터는 가로수로 나란한 벚나무들보다 강가의 버드나무들에 더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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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품으로 동식물 안은 섬진강
들녘 논에 아낌없이 물 대주지만
때론 홍수로 농가 생채기내기도
봄꽃 진뒤 겨울에 쓰레기 보이듯
아름답고 멋진 모습만 있지않아
묵묵히 청소하며 양면 깊이살펴

3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섬진강에 머물기로 했다. 거의 매일 강으로 나가 개들과 함께 습지를 산책 삼아 돌아다니지만, 그것과는 다른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섬진강을 가장 많이 찾는 계절은 사계절 중 단연코 봄이다. 강을 따라 매화와 산수유와 벚꽃이 활짝 피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강변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하고, 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느라 사람들의 손길이 바쁘다.

들녘에서 논농사를 짓는 이들 역시 봄이면 한두 번은 강을 둘러본다. 강변도로의 봄꽃으로도 눈길이 가지만, 강둑을 넘어 강으로 더 가까이 내려선다. 고라니와 수달이 달아나 숨고 백로와 까치들이 물을 차고 오른다. 농부들은 강물에 손을 넣고 휘휘 저으며 유량(流量)을 가늠한다. 이 물을 모내기 전에 끌어 올려 들녘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섬진강이 마르지 않는 한,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논농사를 못 지은 적은 없다고, 평생 들녘을 지킨 농부들이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상류에 댐들이 들어선 다음부터 유량이 예전만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봄 강이 멋지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2020년 여름, 남원과 곡성과 구례가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은 후부터는 가로수로 나란한 벚나무들보다 강가의 버드나무들에 더 눈길이 간다. 무너진 강둑이나 도로는 복구공사를 마쳤지만, 습지에서 유난히 잘 자라는 버드나무들은 가지나 줄기가 부러진 채 그대로다. 잎과 꽃과 열매가 달렸던 높고 아득한 자리에서 여전히 비닐 봉투들이 흔들린다. 얼마나 많은 강물이 성난 소 떼처럼 밀려왔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4년이 가까워도 사라지지 않는 상처요 두려움이다.

일찍이 시인 김용택은 ‘섬진강 5’라는 시에서,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 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라고 적었다. 강을 따라 떠내려오다 나무에 걸리거나 강가로 밀려난 물건들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버드나무만큼이나 겨울에 더 잘 보이는 부끄러움이 있다. 무릎보다 높이 자란 풀들이 말라 눕고 나면, 버려진 쓰레기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부터 캔과 병, 비닐과 종이뭉치와 걸레와 헝겊까지 다양하다. 쓰레기들이 놓인 곳은 강가의 모래와 진흙과 바위에서 강둑의 비탈에 이른다. 봄이 오고 풀이 돋아나면, 쓰레기들은 그곳에 있되 점점 눈에 띄지 않는다. 드러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매달 뜻 맞는 이들과 강가에 머물며 쓰레기를 줍기로 했다. 3월부터 당장 시작하는 것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기 전에 눈에 띄는 쓰레기들을 우선 걷어내기 위해서다. 이 일은 강바람 맞으며 좋은 길로 다니는 산책과는 다르다. 장갑을 낀 채 길 아닌 곳을 탐정처럼 훑어야 한다. 수시로 멈춰 허리를 굽히거나 앉는다. 쓰레기를 줍다 보면 질문들이 저절로 생겨난다. 이토록 많은 쓰레기들은 어디서 왔을까. 누가 언제 버렸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버려질 것인가.

강가에 쓰레기를 방치하면, 그곳을 오가는 동물들과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식물들에게 위협이 된다. 또한 강물로 벼농사를 짓는 논은 오염되고, 들녘에서 수확한 쌀로 밥을 지어 먹는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중요한 원인인 것이다.

봄꽃이 피거나 여름 뙤약볕이 내리쬐거나 가을 잎이 떨어질 때도 강가의 쓰레기를 찾아다니며 줍다 보면, 겨울이 다시 올 것이다. 그때 강가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발견할까. 봄날 강가에서, 꽃을 우러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아름다움과 추함을 깊이 살핀 하루였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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