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눈칫밥도 좋다니
간신히 대도시 고등학교에 진학한 어린 시절, 숙식이 난제였다. 담임 선생님의 주선으로 중학생 형제의 입주 가정교사가 되었다. 밤 11시까지 책상 앞에 붙들고 앉아 복·예습시키기, 각종 시험 대비해주기 등이 내 임무였다. 녀석들은 왜 책상 앞에만 앉으면 졸고, 월말고사는 어찌 그리도 자주 돌아오는지. 성적표 받아오는 날부터 그 부진한 성적의 기억이 사라지는 날까지 전전긍긍이었다. 난생 처음 경험한 눈칫밥이었다.
크고 작은 기업체들의 책임자급으로 일하던 지인들이 있다. 음으로 양으로 늘 평가에 시달리던 그들. 불경기에 경쟁 또한 심하니 좋은 실적을 올리기 어렵다고 했다. 좋은 시절엔 보너스도 당당히 받았으나, 실적이 나쁘니 월급 받기도 면구하다는 하소연이었다. 최근 국회의원들 평가가 심심찮게 거론되는 것을 보니, 정치인이나 공직 사회에도 평가는 있는 모양이다. 국민 세금으로 밥을 먹는 그들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갖고 있다면, 국민의 눈치가 왜 안 보이겠는가. 퇴직 후 특별한 일 없이 지내며 가족들의 표정을 살펴야 하는 적지 않은 가장들도 있다. ‘삼시 세끼’ 부인이 차려내는 밥은 영락없는 눈칫밥일 수밖에 더 있는가.
‘시위소찬(尸位素餐)’이란 성어가 ‘한서’에 나온다. 한나라 성제 때 주운(朱雲)이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아첨을 일삼던 장우(張禹)를 논척하며 쓴 말인데, ‘백성에게 아무 보탬도 되지 못하고 자리만 지킨다’는 뜻을 갖고 있다. 어찌 장우 한 사람뿐이랴. 관청이나 국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 그 울타리들 안에 시위소찬하는 무리들은 득실거린다. 자신들이 눈칫밥을 먹고 있는 줄도 모르는 그들이다.
밥값도 못 하면서 얻어먹는 밥, 주는 사람의 불만을 반찬 삼아 먹는 밥이 눈칫밥이다. 자신이 밥값도 못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자이리라. 대부분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당당하다. 그 점이 공동체를 퇴보시켜 온 역사의 비극이다. 닥쳐온 정치의 계절, 시위소찬해온 자들이 이번에도 무더기로 출마했다. 국민은 이들에게 ‘밥값도 못 한 자’라는 딱지를 붙여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다음에 그들은 눈칫밥을 또 먹자고 덤벼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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